디지털교과서, 교육혁명인가 교육재앙인가

한 유명 이동통신사의 TV 광고에는 상상 속 미래 교육환경이 한 장면이 등장한다. 환자복을 입고 있는 어린 학생의 병실 속 한쪽 벽면에 학생이 다니던 교실 풍경이 나타나고 동급생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의 강의를 실시간으로 듣는다. 화면은 마치 교실 속에 앉아있는 듯 생생하고 앞자리에 앉은 친구는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든다. 이 공간에서 학생은 더 이상 환자가 아니다. 교실 속 소리와 움직임이 한눈에 보이고 교실에 있는 친구들과 같은 내용을 배운다. 입원기간 동안에도 학업은 계속되고 퇴원 후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것도 훨씬 수월해진다.

미래 교육환경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이 TV 광고는 가상현실과 양방향 통신기술 등을 적용한 상상이지만 개별 요소들의 기술은 상당 수준까지 상용화됐다. 음성인식 기술을 이용한 어학공부, 이러닝 기술을 이용한 가정 학습이 이뤄지고 있고 음악과 과학 분야에서도 첨단 IT 기술을 접목해 1:1 개인 레슨을 대신한 소프트웨어, 거대한 자연현상을 생생하게 볼수 있는 동영상 등이 서비스되고 있다.  점점 더 다양한 IT 기술이 교육현장에 녹아들면서 지역과 시간의 경계를 넘어 동일한 교육서비스를 제공하고 있고 또 새로운 교육시장으로 자리잡으면서 확대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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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후면 전국 초중고에서 디지털교과서로 수업한다

이들 다양한 미래 교육환경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것은 단연 디지털교과서다. ‘교과서 내용을 디지털화 서비스한다’는 어떻게 보면 매우 단순한 아이디어인데 현재 논의되고 있는 교육적, 경제적 파급 효과는 상상 이상이다.

디지털교과서의 기본 개념은 현재의 서책형 교과서를 디지털화해 데스크톱, 태블릿PC (심지어 스마트폰에서도!) 등 다양한 기기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학습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기존의 서책형 교과서에는 담지 못하는 다양한 멀티미디어 자료를 추가하고 교과서, 참고서, 문제집 등을 동시에 지원해 책가방 무게를 가볍게 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디지털교과서의 시작은 199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97년 기초연구를 시작한 이후 지난 2002년 ‘디지털교과서 개발과 보급을 위한 중장기 계획’, 2007년 ‘디지털교과서 상용화 추진방안’이 연이어 발표됐다. 이후 국어, 사회, 과학, 영어, 수학 과목 등에 대한 디지털교과서 콘텐츠가 시범 개발됐고 지난해 기준 전국 130여개 초중등학교 일부 학급에 시범 적용돼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6월 발표된 ‘스마트교육 추진전략’은 디지털교과서 시대의 청사진을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된 이 계획에는 2014년 초등학교를 시작으로 2015년까지 초중고등학교 모든 교과서를 디지털교과서로 개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제 3년 후면 전국 초중고등학교에서 디지털교과서를 이용한 수업이 시행된다는 의미다. 이를 위해 향후 3년간 2조 2000여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다.

정부가 설명하는 디지털교과서의 효과는 현행 교육제도와 교육산업의 문제에 대한 해법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교실 수업이 개선되면서 공교육의 경쟁력과 만족도가 높아지고 이는 곧 사교육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효과로 이어진다. 경제적인 효과는 세계시장을 무대로 펼쳐진다. 디지털교과서 관련 민간 콘텐츠 시장이 확대돼 관련 국내산업의 경쟁력이 강화되고 고용이 늘어나며 국내 성공사례를 바탕으로 세계 디지털교과서 표준을 선도해 국내 업체의 해외 시장 진출도 활발하게 이뤄진다고 정부는 설명한다.

교육효과부터 예산, 저작권까지 논란의 중심에 선 디지털교과서

그러나 이런 청사진과 달리 실제 교육현장에서 디지털교과서에 대한 정서는 다소 차이가 있다. 오히려 디지털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은 지난 90년대부터 꾸준히 계속돼 왔고 매우 다양한 방향으로, 또 매우 격렬하게 진행돼 왔다.

가장 뜨거운 논란은 효과성이다. 디지털교과서로 바꿨을 때 학생들 교육에 (더 조악하게 말하면 성적을 올리는데) 도움이 되느냐는 것이다. 정부는 지난 2008년부터 디지털교과서를 먼저 적용한 일부 학급과 그렇지 않은 대조군 학급 학생을 비교분석한 디지털교과서 효과성 연구를 매년 진행해 왔다. 그러나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변화가 발견됐다’는 정도이고 실제로 드라마틱한 변화가 확인된 것은 매우 드물다. 특히 올해 발표된 보고서에는 과학과 사회과목 일부 학년을 제외한 교과목에서 기존 서책형 교과서로 공부한 학생과 차이가 없다는 오히려 후퇴하는 결과가 나와 정부를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보고서를 보면 기존 ‘효과가 있다’에서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로 표현이 후퇴했다. 

구분2008년2009년2010년2011년
학업성취도학업성취도
성과 있음
학업성취도
성과 있음
과학과목
학업성취도
성과 있음
초등학교 4학년 과학·사회,
초등학교 5학년 과학 등
일부 학년 일부 과목
학업성취도 성과 있음
<표> 연도별 디지털교과서 효과성 연구 결과 (출처 : KERIS)

예산도 논란거리다. 당초 디지털교과서는 쓰기가 가능한 휴대용 컴퓨터에 교과서 내용을 별도 프로그램 형태로 설치해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동영상 재생과 쓰기 인식 등을 위해 높은 사양이 필요했기 때문에 초기에 디지털교과서용 태블릿PC로 보급된 제품은 HP의 최고가 노트북 제품이었다. 당시 시장가격은 300만원대, 정부에 공급한 가격도 200만원대 중반이었다. 이런 방식의 디지털교과서라면 예산이 얼마나 들까. 2011년 기준 전국의 초중고등학생은 약 700만명이다. 대당 250만원으로 잡아도 단말기를 구입하는 비용만 17조4700여억원이다.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한 정부는 결국 디지털교과서에 클라우드 기술을 도입해 마치 포털사이트에 접속해 기사를 보듯 학생들이 디지털교과서 사이트에 접속하면 교과서 콘텐츠를 보고 학습 내용도 기록할 수 있도록 서비스 방식을 수정했다. 이 경우 인터넷 기능을 지원하는 대부분의 단말기를 사용할 수 있으나 패드 제품의 가격이 여전히 100만원에 육박한다. (이것이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디지털교과서 사업에 대기업 전자업체들이 공을 들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다)

디지털교과서를 둘러싼 또다른 논란은 법과 제도 측면이다. 디지털교과서의 법적 지위 부여 문제 등이 있지만 가장 첨예한 것은 저작권이다. 현재 교과서에 사용된 저작물은 일정 부분 저작권이 유예되거나 혹은 낮은 가격에 일괄 저작권료를 지불하도록 하고 있다. 교육목적이라는 공익적 특수성을 고려해 저작권 행사를 일정 부분 제한한 것이다. 그러나 디지털교과서는 매체 특성상 동영상과 사진, 문학작품 등 다양한 저작물을 더 많이 필요하다. 관련된 주체가 많은 만큼 더 정교한 저작권 지불 모델이 필요하고 적절한 수준의 저작권료를 정하는 것도 숙제다. 특히 현재 추진중인 디지털교과서 모델은 온라인 형태로 보급되기 때문에 온라인 전송권의 문제가 추가로 걸려 있다. 최근 대학의 수업목적 저작권보상금 제도 논란에서 볼 수 있듯 최근 교육 현장에서의 저작권 문제는 오히려 확산되고 있는 추세다. 해외의 경우 저작권 때문에 디지털교과서 정책 자체가 좌초한 사례도 있어 저작권이 의외의 복병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터치와 쓰기 기능을 지원하는 태블릿PC

최근에는 디지털교과서 사업 자체에 대해 정부와 일선 교육청 간의 엇박자도 감지된다. 기존의 디지털교과서 사업은 ‘연구학교’ 방식, 즉 많은 학교가 계획안을 경쟁적으로 제출하면 교과부가 이들 계획을 평가해 좋은 평가를 받은 학교에 예산을 지급하는 식이었다. 먼저 적용하는 학교에 돈과 평가라는 혜택을 주는 셈이다.

그러나 일부 교육청의 경우 이러한 연구학교 제도가 학교간 경쟁을 부추겨 득보다 실이 더 많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10년 132개에 달했던 디지털교과서 연구학교는 2011년 63개로 반토막났다. 교과부와 교육청이 서로 다른 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은 정책 일관성 측면은 물론 향후 디지털교과서 관련 입법과정에서도 잠재적 리스크가 될 전망이다.

대기업만 배불리는 디지털교과서 사업?

정부가 지난 1997년 이후 15년 가까이 교육의 미래라고 홍보해 온 디지털교과서 사업은 이처럼 효과와 예산, 제도 등 모든 측면에서 논란 속에 갇혀 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디지털교과서가 교육보다 대기업 중심의 사업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단말기 업체가 대표적이다. 디지털교과서가 기존의 태블릿PC 방식에서 클라우드 방식으로 바뀌면서 하드웨어 사양이 많이 낮아질 전망이지만 여전히 막대한 신규 하드웨어 수요가 예상된다. 아이패드와 갤럭시탭 등 주요 패드제품을 기준으로 대당 80만원으로 계산해도 5조원 가까운 신규 시장이 열리게 된다. 삼성전자가 디지털교과서 관련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디지털교과서 사업시행 기관인 한국교육학술정보원(KERIS)의 원장 교체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디지털교과서용 하드웨어의 비용을 학부모와 정부, 어느 쪽에서 부담할지는 아직 결정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막대한 예산 수요를 고려했을 때 무상으로 보급될 가능성은 낮고 저소득층에 대해 선별적으로 정부가 하드웨어를 지원하는 방안이 될 전망이다. 실제로 정부는 현재 저소득층 가정에 PC와 인터넷비용 등을 지원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대규모 정부쪽 수요 시장을 겨냥하는 것은 물론 민간 시장에서도 ‘정부공인 디지털교과서용 태블릿’ 식의 홍보가 가능해진다. 삼성전자가 수년전부터 디지털교과서 사업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다.

통신업체도 디지털교과서 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인식하고 있다. 디지털교과서는 학생들이 학교 내에서 자유롭게 인터넷 접속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에 무선통신망을 통해 서비스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러나 현재 각급 학교에는 컴퓨터실 일부에 유선통신망이 설치돼 있을 뿐 무선망 구축 비율은 미미한 수준이다. 디지털교과서의 전면 도입은 곧 전국 초중고등학교에 무선통신망이 설치되는 것을 의미한다. 전용선 1회선당 비용이 최소 100만원이 넘고 일단 디지털교과서가 전면 도입되면 설치된 무선통신망을 꾸준히 사용해야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통신사들에게 향후 수십년간 안정적인 매출원이 될 것이다. 실제로 정부 계획에 따르면 2조2000여억원에 달하는 스마트교육 예산 가운데 통신 인프라 구축 비용이 2700여억원, 단말기 비용이 8000여억원에 달한다. KT가 디지털교과서 시범사업에 입찰하면서 태블릿PC를 시중 가격의 절반 가격에 납품한 것도 이러한 미래 가능성에 주목한 베팅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IT 기술과 기업 논리만으로 채워진 디지털교과서 사업

디지털교과서 정책에 사업논리와 적용할 기술, 제품 논의만 풍부해지면서 정작 교육에 대한 논의는 실종됐다. 디지털교과서 도입의 의미, 교육현장의 변화상에 대해서는 관심이 크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정부의 스마트교육 예산을 살펴보면 전체 예산 2조 2000여억원 가운데 새로운 교육과정을 만드는 예산은 ‘스마트교육 연수과정 개발 및 보급 사업’ 18억원, ‘스마트학습 모델 개발 및 연구학교 운영 사업’ 48억원 등 2015년까지 채 60여억원, 전체 예산의 고작 0.3%에 불과하다.

그러나 교과서의 변화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교과서는 교육내용을 담은 일종의 그릇, 형식이지만 초중고 의무교육을 통해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학습되는 방식이나 내용이고 이들이 성장해 우리 사회를 구성해 나간다는 점에서 우리의 미래를 변화시키는 핵심 변수인 셈이다. 지난해 민주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둘러싼 용어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교과서의 내용이 우리 사회에서 갖는 의미는 매우 민감하다.

특히나 단기간에 공교육 교과서를 모두 바꾸는 현재의 디지털교과서 정책은 세계적으로도 전례를 찾을 수 없다. 현재까지 디지털교과서 도입을 검토, 추진한 곳은 말레이시아, 싱가폴, 미국 등이 꼽힌다. 그러나 말레이시아는 1995년부터 ‘스마크 스쿨 프로젝트’를 시작해 2000년 이후 전용 단말기를 개발해 50개 학교 4000여명에게 보급했다가 콘텐츠의 저작권, 인프라 문제 등에 부딪혀 실패했고 싱가포르도 1999년 정부 주도로 ‘에듀패드'(eduPAD)를 개발해 시범 보급했지만 통신 인프라 등의 문제로 실패해 현재는 민간 주도로 교과서를 PDF로 변환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다.

최근 미국과 일본은 공격적인 디지털교과서 도입 정책을 발표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지난 2월 향후 5년내에 미국 전역에 디지털교과서를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를 위해 미국은 정부와 관련 업계 전문가들로 구성된 디지털교과서 협의체(The Digital Textbook Collaborative)를 구성했고 교수와 교사, IT 관리자 등이 디지털교과서의 효과를 높일 수 있는 가이드북으로 제공할 예정이다. 학교와 교실, 가정에서 디지털교과서를 활용할 수 있는 네트워크 인프라와 단말기도 단계적으로 제공된다.

일본도 2015년까지 1000만명의 학생들에게 디지털교과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디지털교과서 교재 협의회(Digital Textbook and Teaching) 정책 제언 2012’를 지난 4월 발표했다. 이를 위해 제도개정, 재정확보, 교육정보화 계획 수립, 실행 등을 추진하기로 했다. DITT에는 교과서 출판사와 방송국, 게임 회사, 단말기 제조업체, 광고 회사, 연구소 등 120개 기업과 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이처럼 선진국들의 움직임도 활발하지만 단계적으로 추진하거나 혹은 서비스 제공 대상을 일부 학생으로 제한하고 있다. 우리식의 급진적인 디지털교과서 시행정책은 전세계적으로 전례가 없는 셈이다.

개화기 서양식 교과서 도입 과정 ‘데자뷰’

우리 교육역사에서 이만한 변화의 시기가 있었던가. 5년 단위의 교육과정 개편이 주로 내용과 제도에 대한 것이었다면 디지털교과서는 내용과 형식 모두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19세기 후반 개화기 서양식 근대교육 도입 정도를 거론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근대교육의 출발점은 1884년 시작된 갑오개혁이 꼽힌다. 노예제도와 과거제 등 기존의 정치, 사회질서가 전면 재편된 시기로 특히 1894년 11월부터 1895년 5월까지 이뤄진 2차 갑오개혁 기간 동안 한성사범학교, 외국어학교 등 근대교육을 실시하는 내용이 발표됐다. 현재의 교과부에 해당하는 학무국과 편집국을 두고 편집국에 교과서 편집과 번역, 검정 등의 역할을 맡겨 이 때부터 한글 교과서가 본격적으로 출간됐다.
 

초기 근대 교과서 (출처 : cafe.daum.net/ntbook)

갑오개혁 이전까지 우리나라는 ‘향교’, ‘성균관’ 등이 공교육을, ‘서당’이 사교육을 맡는 형태였다. 당시 서당은 책을 읽고 이해하는 ‘강독’, 다양한 문장을 작성하는 ‘제술’, 직접 문자를 쓰는 ‘습자’ 등의 과정을 운영했고 천자문, 소학(小學), 명심보감(明心寶鑑), 동몽선습(童蒙先習), 격몽요결(擊蒙要訣) 등 주로 중국에서 들여온 책을 교과서로 활용했다. 사서(四書), 삼경(三經)은 이들 과정을 마친 학생들이 사용하는 고급과정 교과서였다. 이들 교과서는 왕권을 유지하는 관료 양성을 위해 유교를 비롯한 이를 반영한 사상관에 따라 서술됐다.

갑오개혁 이후 이들 교과서가 퇴출된 자리는 과학과 화학, 영어 등 서양 교과서가 대체됐다. 이는 곧 서양식 교육제도의 이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서양의 지식과 가치관, 제도가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도입되고 서당 등 기존의 교육기관의 역할은 급속히 쇠퇴했다.

본래 서양의 경우 중세시대까지 사람들의 교육이 주로 교회를 통해 이뤄졌다. 서양의 공교육은 종교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자 동시에 자본주의 경제시스템을 구성하는 대규모 노동자를 만들기 위한 시대적 필요에 의한 산물이었다. 이 과정은 프랑스혁명처럼 사회 내부의 변화의 동력으로 추진됐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화 과정에서의 외국 세력의 간섭과 혼란, 그리고 뒤이은 일본의 한반도 강점 등으로 새로운 교육환경의 의미를 냉정하게 평가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시기별 지배세력의 이해에 따라 강제적인 방식으로 추진됐다. 갑오개혁 이후 새로운 교과서 발행에는 유학생들과 선교사들이 큰 역할을 했으며 이들은 교육 권력을 기반으로 사회 지배세력으로 성장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주의 교육이 그대로 이식됐고 해방이후에는 미국식 교육제도가 복제돼 이식됐다. 초중고대학 6-3-3-4로 이어지는 현재의 교육제도도 이때 도입됐다. 1949년 홍익인간을 교육이념으로 하는 교육법이 공포됐지만 625 전쟁이 겪으면서 반공이데올로기가 교육에 과도하게 투영됐고 이것은 현재까지 사회적 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디지털교과서 사업 추진 과정을 보면 근대 교과서 도입 시기와 100년의 시간을 건너 절묘하게 겹치는 대목이 많다. 당시 서구 열강과 일본 제국주의가 근대화를 캐치프레이즈로 교육의 헤게모니,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면 디지털교과서 시대를 목전에 둔 지금은 ‘교육의 미래’를 표방하며 자본주의의 거대 권력인 대기업들이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일선 교육현장의 충분한 논의를 통해 변화를 유도하기 보다는 국가 혹은 특정 세력이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밀어 붙이는 것도 판박이다.

디지털교과서는 교육의 형식과 내용을 바꾸는 시도

교육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그 시대의 가장 뜨거운 논란거리였다. 교육을 사회적인 문제로 적극적으로 해석한 철학자들도 많았는데 그람시는 학교라는 공간을 통해 지배계급이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한다고 봤다. 학교라는 공간은 사실상 계급 투쟁의 공간이고 교과서의 내용과 형식도 결국 그 계급투쟁의 승자 측면에서 쓰여진 역사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현 사회체제를 부정하는 내용이 교과서에 실려 의무교육이라는 형태로 국가가 비용을 대서 교육한다는 것은 전혀 상상할 수 없다. 이런 철학적인 논쟁을 떠나서 근대 교과서 도입 과정에서 혼란을 겪고 현재까지 편향적인 이념의 벽 때문에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는 우리들에게 디지털교과서라는 새로운 시도가 또다른 혼란이 돼서는 안된다.

e교과서

그렇다면 2012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디지털교과서라는 미래는 어떤 교육이어야 할까.

전문가들은 디지털교과서가 단순히 태블릿PC와 새로운 교과서를 도입하는 의미를 넘어 우리 교육환경 전체의 변화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한다. 무엇보다 액정 화면 속으로 들어온 교과서는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다. 음악수업 시간에는 인터넷에 연결해 베토벤 음악을 듣거나 동시대 음악인들의 사진을 통해 실물을 확인할 수 있고 영어수업 시간엔 방대한 인터넷 사전과 동영상을 활용할 수 있다. 직접 체험하고 눈으로 확인하기 어려웠던 자연재해와 동식물의 모습도 디지털교과서라면 간단히 볼 수 있다. 참고서와 문제집을 비롯해 디지털화된 자료라면 그 무엇이든 수업 보조교재로 활용할 수 있고 학생들의 관심과 수준에 따라 맞춤화도 가능하다.

디지털교과서는 동시에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의 변화도 동반한다. 과거 판서와 설명, 시험평가로 이어지는 지식전달자가 교사들의 주요 역할이었다면 디지털교과서 시대에는 개별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대신 학생들에게 고민해볼만한 문제는 던져주고 관련 지식과 인물을 찾아 만나고 스스로 해법을 찾을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한다거나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일종의 멘토 역할을 하는 등 전혀 새로운 모습이 요구되고 있다. 물론 암기여부를 묻는 기존의 평가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디지털교과서 시대의 학습법에 대해서는 아직 정형화된 교안보다는 아이디어 차원의 제안들이 대부분이다. 무한대로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지식과 관점을 편견없이 받아들여 취사선택할 수 있는 ‘비판적인 사고력’이 강조되는 가운데 이러한 미래 인재상을 키워낼 수 있도록 디저털교과서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해 더 많이 논의될 수 있도록 환경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자기주도학습과 프로젝트학습 등이 강조되고 있는 가운데 전세계 학생들을 특정 주제로 묶어 온라인으로 집단 토론과 조사, 회의를 통해 해법을 찾는 ‘위키클래스‘(Wiki-Class) 같은 개념도 제안됐다. 그러나 100여개 정도의 연구학교와 간헐적인 세미나만으로는 이제 3년 앞으로 다가온 본격 도입에 맞춰 완결된 교수학습 모델을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현재 일부 교육청이 추진하고 있는 혁신학교 방식은 특정한 교육방식을 교육현장에 광범위하게 전파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혁신학교는 학교육영과 교육과정 운영의 자율성을 가지며 25명 이하의 학급, 충분한 행정인력, 예산 지원 등이 동시다발적으로 지원되는 패키지 형태의 정책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혁신학교의 이상이 아니라 이를 확대하는 방식이다. 경기도 대표적으로 학교별 혁신학교 운영은 물론, 지구별, 도시별로 혁신학교 모델을 원하는 다양한 지역범주로 관련 모델을 확산시키기 위해 지원하고 있다. 이제 디지털교과서 시행이 3년 앞으로 다가온 것을 고려하면 새로운 교육모델은 만드는 방식도 소규모 연구학교, 그 중에서도 더 작은 수의 학급 단위가 아니라 최소 학교 단위 이상의 광범위한 적용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디지털교과서에는 단말기와 무선랜이 필수적이다. 최소 수조원에 달할 이들 시장을 놓고 관련 대기업들의 물밑 움직임이 벌써부터 분주하다.

‘기술 만능주의’ 완벽한 실패작 ‘e교과서’를 넘어서

본래 디지털교과서 개념이 제기된 것은 ‘디지털 네이티브’, 즉 어린 시절부터 디지털문화에 익숙한 세대가 성장하면서 이들의 경험을 교육에 반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의 생활패턴과 교육현장의 괴리를 좁힐 수 있도록 기존의 교육환경을 바꾸는 작업인 셈이다. IT 기술이 사회 각 분야로 확산되는 최근의 경향을 보면 앞으로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고 IT와 교육의 접목은 ‘찬반의 논리’로 거부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추세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기술은 그 자체로 교육을 대체할 수 없다. IT 기술 자체만으로는 교육의 해법을 절대 내놓을 수 없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 이미 매우 모범적인 오답을 갖고 있다. 바로 ‘e교과서’다. e교과서는 서책형 교과서의 내용을 CD 매체 형태로 개발한 것으로 2011년부터 국어, 영어, 수학 과목을 순차적으로 개발해 보급하고 있다. 학교에서는 서책형 교과서, 집에서는 e교과서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인데 디지털교과서로 가는 과도기적 시도였다. 이 사업에는 2011년 324억원, 올해도 1학기에만 184억원이 투입됐다. 지난 10여년간 디지털교과서 사업 전체 예산과 버금가는 막대한 금액이다.

그러나 한 교사단체가 초중등학생 5000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초등학생의 83%, 중고등학생의 98%가 ‘e교과서를 활용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학생 10명 중 8~9명은 포장지도 안 뜯고 그냥 버린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사업은 감사원의 지적을 받았고 올 2학기부터 온라인 다운로드 형태로 바뀌었다. 현재의 이용률을 고려하면 개발비는 개발비대로 업체에 지불하고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용도폐기되는 수순을 밟을 전망이다.

e교과서의 실패는 디지털교과서 사업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e교과서는 기존의 서책형 교과서 콘텐츠를 CD에 담은 것 이외에 영어 교과서의 경우 원어민 음성과 동영상 등 멀티미디어 자료까지 담았다. 지금까지의 디지털교과서 연구성과의 상당 부분이 적용됐고 일부는 민간 이러닝 기술이 접목됐다. e교과서가 실패한 것은 ‘쓰는 행위’가 배제되고 콘텐츠 복사가 안되는 기능성의 한계 등 다양한 요인이 꼽히지만 무엇보다 교육과정 내에 어떤 형태로든 참여할 수 없도록 단절된 채 기술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어 e교과서는 그 자체로 좋은 자료이고 또 새로운 기능을 담고 있지만 일상적인 학교교육과 전혀 연계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교사도 학생도 전혀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교과서는 지금까지 시대의 담론을 담는 그릇 역할을 해 왔다. 디지털교과서는 그 새로운 추세의 핵심 형식이자 내용이다. 특히 기존의 교과서는 주로 사회안정을 위한 보수적인 콘텐츠가 주로 반영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지만 디지털교과서로의 전환은 교과서 콘텐츠의 수정이 용이해지고 교과서의 편향성을 불특정 다수의 자료를 통해 보완할 수 있는, 그래서 공교육의 헤게모니가 소수의 기득권층에서 교육주체 전반으로 확대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디지털교과서는 우리 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들 수 있는 교육 내용을 담는 그릇, 그리고 그 내용이 균형감을 가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만들어진 프로세스가 되어야 한다. 지금의 대기업과 교육관료 중심의 디지털교과서 논의는 막대한 신규 시장을 앞당겨 실현하는 효과는 있겠지만 결국 그 이익은 소수의 기득권층이 독식하고 대다수 학생과 학부모의 교육환경은 큰 변화가 없는 ‘제2의 e교과서’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것은 100년전 근대 교과서 도입 당시 시행착오의 반복이자 새로운 교육재앙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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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애플 디지털교과서 생태계 분석 박충식 외 KERIS 2012년
2011년 디지털교과서 효과성 측정 연구 김회수 외 KERIS 2012년
‘스마트교육, 이대로 괜찮은가 : 교수학습 교육정보화사업의 허와 실’ 토론회 자료집 좋은교사운동본부 국회의원 유은혜 2012년
인재대국으로 가는 길 : 스마트교육 추진 전략(안) 국가정보화전략위원회 교과부 2011년
디지털교과서 도입에 대한 법률적 문제 : 저작권법을 중심으로 최진원 정보법학 제14권 2011년
교육사회학 손준종 문음사 2001년
한국국학진흥원 홈페이지

Last Updated September 01, 2012 8:59:54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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