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매력, 바로 '불완전성'

애니메이션 십이국기

<십이국기>(일본, 오노 후유미 지음) 12권 발매소식이 들려 왔다. 마지막 11권이 한글 번역돼서 나온 것이 2004년이니 거의 10년만에 후속작이 나오는 것이다. (12권의 한글 번역 출간 소식은 아직이다) 팬들 사이에서는 ‘어떻게 초등학생때 본 책이 어느 새 대학 졸업할 때까지 후속작이 안나와!’라는 원성을 듣고 있지만 오히려 작품 자체가 얼마나 매력있는 지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 <십이국기>(코바야시 츠네오 감독, 일본, 2002년) 역시 10년 가까이 됐다. 45회 장편 애니메이션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상당히 흡입력 있었던 작품으로 기억한다. 새로운 시리즈 발매 소식에 맞춰 오랜 만에 다시 꺼내 봤다. 이제는 찾기도 힘든 화면 비율인 4:3의 스크린 사이즈에 제작비를 아끼기 위한 ‘같은 장면 또 쓰기’, ‘정지 화면에 대사만 입히기’ 등 열악했던 제작환경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작품 자체는 과연 10년의 세월을 넘어 기억에 남을만 했다.

초반의 약간의 혼란스러움이 정리되고 나면 매회 정신없이 빠져든다. 양방언의 오프닝부터 심장을 뛰게 한다.   확실히 최신작들과 비교해보면 화려한 맛은 떨어지지만 스토리를 다루는 솜씨과 인물과 인물 간의 연결 솜씨, 시청자를 위한 감정 여백의 시간, 사건을 배열하는 테크닉 등이 월등하다. 어쩌면 이런 것이 ‘고전의 맛’이고 기꺼이 다시 찾아보는 사람만이 누리는 행복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10여년 전에 봤던 때와 다시 본 <십이국기>는 메시지가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가치의 우선순위가 달라진 것도 한 요인일 수 있다.    

<십이국기> 속 세계는 12개의 나라로 구성돼 있다. ‘기린’이라는 절대선을 상징하는 생물이 인간들 중 왕을 선택하고 그의 통치를 지원한다. 사람은 나무에서 알의 형태로 태어나고 요괴와 인간, 반인반수 등이 공존하는 전형적인 판타지 속 공간이다. 이른바 ‘식’이라는, 바다가 열리는 현상을 통해 현실 세계와의 통로가 열리고 이 때 두 세계 간의 교차가 이뤄진다.  

이야기는 현실에서의 평범한 여고생 ‘요코’의 일상에서 시작된다. 그는 우등생에 반장이지만 항상 남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자존감을 찾아보기 힘든 수동적 인물이다. 그러나 ‘식’을 통해 현실 세계로 넘어온 기린과 일군의 요괴들이 그를 덥치고 결국 그는 십이국기의 세계로 건너온다. 그는 12개 나라 중 한 나라의 왕으로 선택된 인물이었던 것이다.  

<십이국기>의 초반부는 어떤 사건으로 기린에게 버려진 채 낯선 세계에서 힘겹게 살아남는 상황이 그려진다. 처음 만난 이곳의 사람들은 그를 속이거나 혹은 술집에 팔아 넘기려고 하고 우연히 함께 이 세계로 넘어 온 친구들은 저마다의 트라우마 때문에 상황을 더 힘들게 한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 생존조차 불투명한 극한의 상황에서 요코는 점점 더 심리적으로 병들어간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소심한 여고생이 왕으로 변신하기 위한 통과의례다. 그는 요괴와 자연재해, 지도자의 부재에 힘들어 하는 민중들을 경험하고 그들에게 배신당하며 상처받는다. 그리고 이제 스스로 그들을 이용하고 배신하고 상처주기로 결심한 순간 다시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특히 유랑극단, 반인반수 등 십이국기 속 세계에서 오랫동안 이방인처럼 배척받던 존재들이 또다른 이방인이자 곧 왕이 될 요코를 구원한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다.  

<십이국기>는 총 45부작이다. 여기까지가 초반 10회 전후 내용인데 이후 스스로를 자각한 그의 본격적인 건국신화가 펼쳐진다. 초반 전개는 수동적인 모습이 반복적으로 보여지고 심리묘사에 초점을 맞춰 마치 사이코드라마를 연상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중도에 시청을 포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본 <십이국기>의 백미는 바로 이 지점이다. 생각해 보면 <십이국기> 속 세계가 실수없이 운영되려면 절대선을 표방하는 절대자가 가치판단을 하고 이에 따라 통치가 이뤄지면 충분하다. ‘기린’이 혹은 기린과 인간의 중간 정도되는 존재가 직접 통치의 전면에 나서면 된다. 하지만 기린에게 완전 미완성인, 혹은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인간을 왕으로 선택하는 역할만 맡긴 것은 그 불완전성 자체가 곧 인간사회에서 가장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시행착오와 이를 바로잡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고 그것이 모여 인간사회가 한발 더 전진하게 된다는 설정인 셈이다.  

그래서 <십이국기>의 핵심 메시지는 ‘불완전성’, ‘불확실성’에 대한 믿음이다. 타인을 의식하며 맞춰주는 삶도, 나를 속이지 않을까 항상 의심하고 부정하는 삶도 행복하지 않다. 손익을 따지지 않고 인간의 불완전성과 불확실성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사회를 이루는 기본가치이고 그것이 사람들이 공존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스템에서도 선택받은 자에게 두번의 기회는 없다. <십이국기> 속에서 기린은 왕을 선택하고 나면 수족처럼 부리는 요괴들과 함께 철저하게 왕에게 복종한다. 왕의 부재는 곧 사회의 혼란과 백성의 고통을 의미하기 때문에 왕의 수명은 영원하고 심지어 500년간 한 사람이 다스린 나라도 있다.  

그러나 왕이 실정을 거듭하면 그를 선택한 기린이 먼저 병에 들어 죽고 (기린이 죽으면 그가 수족처럼 부리던 요괴는 기린의 몸을 뜯어먹고 그 힘을 취한다. 그것을 위해 평생 기린-왕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정통성을 잃은 왕도 실각 후 죽음을 맞게 된다. 이른바 ‘실도'(失道)다. 죽음으로 정치적 책임을 치러야 하는 가혹한 시스템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조차 인간에 대한, 그 불완전성에 대한 믿음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프리덤

인간은 연악하고 불완전한 생물이지만 그래도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는 애니메이션 <프리덤>(오토모 가츠히로 감독, 일본, 2008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작품의 배경은 월면도시 ‘에덴’이다. 지구는 이미 100년전 자원을 둘러싼 전쟁으로 사람이 살 수 없게 됐고 살아남은 인류는 달 반대편에서 도시를 짓고 완벽한 통제사회를 유지하며 살아간다. 모든 사람의 팔에는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지시하는 팔찌가 채워져 있다.  

그러나 우연히 지구에서 촬영돼 달까지 날아온 사진을 발견한 십대 후반의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지구에 직접 가게 되고 에덴의 지도자들이 여전히 지구는 죽은 별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을 알게 된다. 에덴의 지도자들은 다시 살아난 지구에 기술문명이 전파될 경우 다시 전쟁과 파괴가 되풀이될 것을 우려해 지구와의 접촉을 차단했던 것이다.  

복원된 지구에 다시 ‘에덴’의 첨단 과학문명이 전파된다면 결국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전쟁을 벌이고 스스로 멸망을 향해 전력 질주해 갈까. <프리덤>은 그렇다고 우려하는 기성세대와 사진 한장에 36만km를 날아 기어이 당사자를 만나고 마는, 그러니 기회를 달라는 젊은 세대의 패기와 희망을 화려한 비주얼로 보여준다. 인간은 실수를 반복해 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한번 믿을 만한 존재라는 것이다.  

반면 인간의 판단능력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하는 영화들도 많다. <지구가 멈추는 날>(스콘 데릭슨 감독, 미국, 2008년), <노잉>(알렉스 프로야스 감독, 미국, 2009년)이 대표적이다. 이들 영화들은 인류의 역사가 결국은 파괴와 불신의 반복이었고 결국 암울한 종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사실 불완전성은 고통스럽다. 우리가 사는 현실 세상에 <십이국기> 속 ‘기린’ 따위는 없다. 그나마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이 ‘선거’지만 이 제도를 둘러싼 환경과 운영원리는 여전히 한계를 갖고 있다. 그래서 마치 선악이 공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혹은 그렇게 왜곡되고) 선거를 치를 때마다 오히려 패배감과 무기력이 반복적으로 재생산된다. 더 근본적으로는 ‘51% vs. 49%’ (어떤 의미에선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숫자로 결정되는 방식은 현대 사회의 다양한 가치관과 바램을 제대로 반영하기에는 정당성도, 권위도 너무 부족하다.  

<십이국기> 속 세계가 매력적인 것은 다시 한번 원칙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단점 혹은 한계처럼 보이는 불완전성이 오히려 인간을 인간답게 하고 사회를 역동적으로 변화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기린’이 직접 통치하는 대신 더 발전할수도, 오히려 퇴보할 수도 있는 인간의 불확실성에 맡겨 국가를 운영해 나가는 방식을 말한다. 어차피 신은 설사 존재한다고 해도 그 스스로 메시지를 전하기 보다는 오랜 기간에 걸쳐 메시지가 ‘인식되도록’ 할 뿐이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단점도, 한계도 뚜렷한 인간, 우리 자신들 뿐이다.  

그래서 스스로의 길을 자각하는 순간 속터지는 여고생은 왕이 되고 우연히 발견한 사진 한장을 쫓아 36만km를 우주공간을 날아가 100년간의 금지된 비밀을 깨부순다. 반면 어떤 이는 왕으로 선택된 친구를 시기해 스스로 파멸해 나가고 외계인 손에 이끌려 지구를 떠나는 딸을 무심히 지켜봐야 하는 부모가 된다.  

솔직히 말하면 비관론이 오히려 더 가깝게 느껴진다. 우리나라만 보아도 나의 삶은 인생에서 가장 정치 의식이 높은 시기를 보수정권 10년으로 채우고 있다. 지난 대선 공약들이 하나둘씩 ‘없던 이야기’가 돼 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으면 분노를 넘어 무기력과 냉소가 흘러 나온다. 그렇게 역사는 성장해 간다고 이해하기에는 조급함이 이성적인 판단을 앞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조금 더 희망을 품어보고 싶다. 아직은 51%를 시기하면서 스스로 파멸해가고 싶지도 않고 외계인 손에 이끌려 지구를 떠나는 딸을 무심히 지켜보는 부모가 되고 싶지도 않다. 할 수 있는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2개의 응답

  1. Haple 아바타

    글 잘쓰시네요
    십이국기 재밌게 본 사람으로 동감하고 갑니다

  2. vuddhs 아바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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