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하라, 시간에 쫓기지 않는 삶을

사람들은 바쁘다. 항상 바쁘다. 점점 더 성능이 좋은 컴퓨터를 사용하고 열차, 자동차도 빨라지고 있지만 시간에 쫓긴다. 상상할 수 없었던 신기술과 첨단 소프트웨어가 더 많은 정보를 더 짧은 시간에 처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지만 그래도 시간이 없어 허덕인다.   그 결과 세계 경제는 (거의) 매년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 세계 경제규모는 우리가 산술적으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수준까지 커져 버렸다. 체감되는 숫자 개념은 일정 수준까지만이다. 그걸 넘어선 것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동시에 나는 더 바빠진다. 더 촘촘하게 시간을 관리해도 점점 더 시간에 쫓기고 일상에 치인다. 가족과 연인, 음악, 영화, 스포츠 등은 이런 바쁜 삶의 위로 혹은 원동력이 되기도 하지만 일종의 몰핀 주사일 뿐이다. 정신없이 달려가지만 어느 순간 그 덧없을 깨닫게 되면 힘이 빠지고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절망에 부딪힌다. 무기력감에 의욕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왜 그럴까.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지는데 왜 우리는 점점 더 시간에 쫓기는 것일까. 무엇보다 우린 과연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 시간에 쫓기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슬로우, 무한경쟁 시대를 넘어서기 위하여(플로리안 오피츠 지음, 도서출판 로도스, 2012.3)는 바로 이 시간의 문제를 쫓아 전세계를 누빈 일종의 여행기다. 지은이는 세계 각지에서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우리는 왜 불안하게 시간에 쫓기며 사는 것일까. 시간관리의 제왕으로 알려진 강사를 만나기도 하고 불안증세로 고통받는 현대인의 모습을 탈진증후군 전문가를 통해 확인하기도 한다. 이를 벗어나보겠다고 디지털 세계 자체와 단절하는 것을 시도한 기자를 만나기도 하고 시간에 대해 오랜기간 연구해 온 교수를 만나기도 한다.  

속도와 경쟁은 이미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세계적인 컨설팅 업체의 임원은 분단위로 쪼개 시간을 관리하면서 남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고 거대 뉴스 통신사인 로이터는 100만분의 1초 빠른 뉴스를 경쟁사보다 먼저 내보내기 위해 특정 뉴스와 정보를 생산해낼 수 있는 인공지능까지 개발하려 하고 있다. (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내게 이것은 정말 끔찍한 상상이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 이 아찔한 속도경쟁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인간 자체가 되버린 것이다.  

과연 이 미친듯한 속도 집도집착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있을까. 다시 지은이는 잘나가는 금융전문가에서 알프스 산장지기로 변신하려 노력하는 한 사람을 만난다. 스위스 산골에서 3대째 소를 키우며 치즈를 만드는 가족도 만난다. 그리고 칠레에서 전재산을 털어 국립공원을 만들고 있는 노스페이스 창업자를 만나 산업화와 세계화로 대변되는 이 속도경쟁에 대항하는 방식을 체험한다.  

이제 남은 것은 슬로우, 느리게 사는 대안을 상상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부탄으로 날아간다. 국민총생산에 대응되는 ‘국민총행복론’을 통해 서구 자본주의와 다른 길을 실험하고 있는 부탄은 여전히 논란 속에 휩싸여있지만 그러나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슬로우는 책 전체에 걸쳐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왜 우리는 시간에 쫓겨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의식만 뚜렷할 뿐 그 문제와 대안에 대해서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주장의 수위를 낮추고 있다. 그래서 오히려 읽는 이로 하여금 이렇게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한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할 수 있도록 한다.  

세상이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그래서 시간에 쫓기면서 바쁘게 살아야 하는 것은 그래야 생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일용할 양식을 얻고 집세를 내고 아이를 학교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시간도, 선거 관련 정책을 꼼꼼히 챙겨볼 시간도 없는 것이다. 바쁘게 사는 것이 좋은 것이고 정치는 다 똑같은 놈이 싸우는 것이라는 푸념섞인 넋두리는 그만큼 우리가 시간에, 삶에 매여 한박자 쉬어갈 시간조차 없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철학과 문학, 민주주의가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은 시민들이 사색할 수 있는 여유를 갖는 대신 나머지 생존을 위한 노동을 모두 노예가 했기 때문이다.

지은이가 그 대안의 출발점으로 제시한 것이 바로 ‘조건없는 기본소득’이다. 이건희 삼성 회장부터 서울역 노숙자까지 매달 일정액씩 아무 조건없이 주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반드시 팔아야 하고 그 노동시간에서 살아남기 위해 속도경쟁, 시간경쟁을 해야 하는 악순환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이 개념은 이미 오랜기간 논의가 진행돼 왔다. 유럽의 경우 독일이 지난 2010년말 이를 위한 공청회까지 진행했다. 모든 성인에게 매달 1500유로(약 208만원), 아동에게는 그 절반을 조건없이 지급하자는 것이다. 예산 등을 고려해 금액을 낮추고 선별적으로 추가 지원하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의 가장 중요한 것은 금액 수준이 아니다. 그것은 국가별 상황에 따라 제도추진 방향에 따라 천차만별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무한 속도경쟁, 시간경쟁을 통해 경제를 성장시켜야 인간의 삶이 더 행복해 질 것이라는 생각이 체험적으로 깨지고 있고 서구에서 이에 대한 대안들이 활발하게 논의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청년 실업자들에게 매달 일정액을 조건없이 지급하자는 논의가 나온 적이 있다. 사실상 ‘조건없는 기본소득’의 한 사례다. 더 보편적으로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인구 4800만명을 기준으로 한달에 10만원씩, 연 120만원을 일괄 지급하기 위한 비용이 57조 6000억원이다. 올해 보건 복지 노동 예산 총액이 97조원이니 현재 세입세출 규모로는 당장 실현하기 한계가 있다. 그러나 조건없는 기본소득 개념은 동시에 선별적 복지를 위한 예산과 인력, 조직을 줄이고 전면 개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개편과 함께 금융소득, 고소득자, 법인세 확대 등 세제 개편, 탈세 추적, 지하경제 관리 등을 강화하면서 단계적으로 추진하면 못할 것도 없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의 경우 22조원이라는 막대한 돈을 강바닥 준설과 댐을 만드는데 쏟아부었다. 비정규직, 등록금 문제에 이 예산을 쏟아부었다면 우리 삶의 질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졌을 것이다. 삶의 불확실성을 제거한 효과는 상상할 수없을 만큼 크다. 가정이 복원은 인간 가치와 관계의 복원이다. 가정 단위가 공고해지면 그곳에서 자란 아이들 중에 세계적인 과학자와 경영자, 학자, 문화인 등이 나타날 가능성은 더 커진다. 한국의 스티브잡스, 아인슈타인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사회전반의 불신 풍조가 사라지고 타인에 대한 경계심 대신 신뢰가 구축되는 것만큼 확실한 치안 수단도 없다. 따라서 결국 정책은 예산 자체보다는 의지의 문제다. 국민들이 선거를 통해 어떤 미래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달렸다.

마지막으로 조건없는 기본소득이 있다면 누가 힘들게 일을 하겠느냐는 반론이 들 수 있다. 책에서는 이를 ‘심리적인 논쟁’이라고 표현했다. 맞다, 명백하게 심리적인 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한가지가 바로 생계를 유지하는 삶과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는 일은 다르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한달에 50만씩 받을 수 있다면 당신은 일을 하지 않고 집에서 놀기만 하겠는가?   그렇지 않다. 일정 정도의 노동력 판매는 불가피하다. 오히려 마지못해 하는 일이 줄면서 생산성도 높아질 것이다. 기본소득은 놀고 먹을 수 있는 수단이 아니다. 말 그대로 생계를 위한, 먹을 것 때문에 자존감을 팔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마지노선인 것이다.  

필자는 이 기본소득에 우려에 대해 실제로 기본소득을 마을 단위에서 시행한 사례를 제시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오치베로라는 마을로 주민이 1000여명 정도 된다. 2008년부터 2년간 주민 모두에게 단순노동자의 평균 임금 정도되는 금액을 지급했다.   그들은 우려대로 일도 하지 않고 술이나 마시며 놀면서 살았을까. 그렇지 않았다. 주민들은 오히려 가게를 개업하고 벽돌을 구워 파는 등 삶의 터전을 일구는데 나섰다. 범죄 발생률은 줄었고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도 늘어났다. 이 실험의 한계는 범위가 넓지 않았고 빈곤 퇴치 수단으로 활용됐다는 점이다. 그러나 조건없는 기본소득에 대한 근거없는 비관론에 대한 반박 증거로은 충분히 의미가 있다.  

기본소득이 중요한 것은 현재 노동자와 자본(기업)이 갖고 있는 비정상적인 역학관계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날 재벌과 환자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노동력을 파는 것을 거부할 수 없다. 원하든 원치않든 노동시장에 자신을 내놓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이내 가진 자산을 탕진하고 극빈층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기본소득이 있다면 최저 생계비와 스스로 원하는 (아마도 대가가 매우 적을 가능성이 높은) 노동을 통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스스로 선택하는 빈곤, 굴욕적이지 않은 빈곤, 동시에 생존을 위협받지 않는 빈곤이다.  

오히려 이런 역발상을 통해 새로운 경제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보면 의도치 않았던, 즉 돈을 벌겠다는 생각보다는 호기심과 열정으로 이뤄낸 것들이 실제 경제의 큰 흐름을 바꿔놓은 경우가 많지 않았나. 기본소득은 경제시스템 내에서 노동자와 자본 간의 역학관계를 정상적으로 되돌리고 경제의 역동성과 생명력을 복원하는 첫 출발점일 수도 있다.  

지은이는 책의 결론에서 우리가 너무 쉽게 종말을 이야기한다고 말한다. 시간에 쫓기면서 스스로를 소비하는데 급급해 한계에 부딪힐 때 오히려 너무나 쉽게 끝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경제시스템은 채 200년이 되지 않았다. 대신 더 창의적인 대안을 고민해 볼 것을 지은이는 제안한다. 상상하는 만큼 이뤄진다. 상상하지 않으면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항상 시간에 쫓겨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삶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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