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함 만으로는 행복해 질 수 없어, 톱니의 의미찾기

<다이하드> 시리즈의 5편인 <다이하드 : 굿 데이 투 다이>(2013년 미국, 존 무어 감독)는 성실한 영화다. 맥클레인은 다소 늙기는 했지만 기존 시리즈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무지막지한 떼거지 테러리스트 앞에서 낄낄대고 조롱하면서 혈혈단신, 일당백으로 맞선다.  

뉴욕을 떠나 러시아로 무대를 옮긴 영화는 쉴새없이 총알이 난무하고 차를 때려부순다. 헬기도 등장하는데 기대대로 엄청난 활약 끝에 화끈한 최후를 맞는다. 게다가 이번 영화의 배경은 러시아, 그 중에서도 인류 최대의 원전사고로 꼽히는 (일본의 후꾸시마 원전사고도 끔찍한 재앙이었다는 평가가 속속 나오고 있지만 아직 그 실체가 다 밝혀지지 않았으므로) 체르노빌 지역이다. 설정만으로 긴장감 넘치는 이 지역에서 맥클레인은 방사능에도 낄낄대면서 맞선다! 역시 너무나 성실하게.   하지만 영화의 미덕은 거기까지다. 성실함 만으로 다이하드 시리즈의 아우라을 얻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시리즈의 무게감을 너무 가볍게 본 것이고 동시에 그 오랜기간 <다이하드>를 지지해 온 팬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동안 다이하드 시리즈는 다양한 방식의 ‘미국내’ 테러리즘을 가정해 뉴욕의 경찰 맥클레인의 활약상을 보여줬다. 선악이 공존하는 미국이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각종 테러 위협은 ‘그럴 듯한’ 설정일 뿐만 아니라 (조금 비약하면) 앞으로 미국이 어떻게 변해 가야 하는가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문제는 똑같은 메시지가 러시아를 배경으로 해도 통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영화 속에는 러시아에 대한 다양한 편견이 가감없이 드러낸다. 부패한 러시아 장관과 더 부패한 그 친구, 그리고 돈을 위해 핵 물질을 빼돌리려는 부녀. 그 와중에 맥클레인은 비행청소년 정도로 기억하던 아들이 당당한 미국 정부요원으로 나타난 것을 흐뭇하게 여기며 부자간 환상의 파트너십으로 러시아 악당을 물리친다.

무엇보다 영화는 냉전시대 속 낡은 선악구도에 따라 미국의 모든 가치와 러시아의 모든 가치를 대비시킨다. 아버지를 잃은 테러범의 딸이 이성을 잃고 헬기째 통째로 건물을 들이받는 모습은 사회주의 국가에 관한한 가족의 가치마저 단죄해야 할 것이라고 묘사하는 듯해 불편하다. 80년대에나 가능했을 법한 구도와 논리를 21세기 영화로 보려니 거부감이 먼저 올라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 속 맥클레인은 너무나 성실하게 총을 쏘고, 너무나 성실하게 차를 부수고, 헬기에 맞서 피흘리며 고군분투하지만 그 모습은 안타깝고 시도착오적이라는 느낌이다. 그들은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지만 다이하드 시리즈를 3류 액션물로 추락시켰다. 처음부터 허술한 구조로 지어진 공간에서 성실하게 부숴지는 자동차와 헬기, 건물들은 ‘아깝다’는 생각만 든다. (그나마 성실함마저 곳곳에서 빈곳이 보인다. 아래 사진을 보면 스탭이 차량으로 보이는 오토바이가 오른쪽 하단에 그대로 노출된다. 아마도 이 차량 주변에 여러 대의 카메라를 설치했을 것이다)  

액션 씬에서 스탭 차량(오토바이인)이 오른쪽에 잡힌다. 유일한 장점인 ‘성실함’마저 허술하다.

성실함 만으로는 절대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더 직접적인 (그리고 영화적으로는 <다이하드>와 정 반대 지점에서 감동을 주는) 메시지는 <타인의 삶>(2006년 독일,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통일 직전의 동독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반체제 인사를 색출해내는 베테랑 비밀경찰(슈타지)이 한 예술가를 도청하면서 인간성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당시 동독에는 10만명의 비밀경찰과 이들의 끄나풀(밀고자) 20만명이 있었다고 한다. 최고 지도자에 대한 농담을 했다고 좌천되는 끔찍한 공간이었다. (앗! 이것은 그리 낯설지 않은 상황이 아닌가!)
 
주인공인 비밀경찰 비슬러는 극작가 드라이만의 집에 수십개의 도청장치를 설치해 놓고 그와 그의 애인이자 인기 여배우인 크리스타를 24시간 감시한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깊이 관찰할수록 그들은 반체제 인사가 아니고 오히려 이 감시 자체가 권력자의 잘못된 욕정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게 된다. 수십 년간 다른 사람을 성실하게 관찰하고 (고문에 가까운 방식으로) 심문하고 단죄했던 그는 이제 전혀 새로운 행동을 하기로 결심한다.
 
결국 몇년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면서 비밀경찰과 국민에 대한 감시 활동의 전모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작품활동을 중단했던 드라이만은 자신에 대한 매우 치밀한 도청과 감시가 이뤄졌다는 것과 당시 비밀경찰이었던 비슬러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 한번 성실함을 뒤엎은 결과는 잔혹했다. 비슬러는 그 사건 이후 통일전까지는 우편 감시를 위해 편지에 증기를 쏘여 개봉하는 잡무를 담당했고 통일 이후에는 우편배달부 일을 하고 있다. 현재 쓰는 장바구니 같은 낡은 카트를 끌고 다니면서 편지를 배달하는 비슬러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본 드라이만은 그에게 말을 거는 대신 다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드라이만의 새 책을 구입하는 비슬러의 모습이 그러진다. “선물용 포장을 해드릴까요?” 서점 직원의 질문에 비슬러는 “아니요. 이것은 저를 위한 책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맹목적인 성실함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그의 삶은 남루해 졌지만 그 오랜 시간의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더 오래 계속될 지 모르는) 남루함이 절대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한 것이다.
 

독일은 통일 후 동독 비밀경찰 한사람, 한사람의 신원까지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영화 속에서 가장 충격적인 것은 독일이 통일 후에 동독에서의 주민 감시와 통제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둔 것이다. 감시의 결과물인 보고서 형태의 자료는 물론 심지어 누가 감시실무를 맡았는지 까지 정리해 공개했다. 비슬러의 오늘이 더욱 힘겹고 무서운 것은 그런 과거의 흔적이 여전히 그의 어깨를 누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가족이 아는 것은 물론 아들과 손녀들도 알게될 것이고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반면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일제에 부역했던 이들의 기록은 지금도 ‘논란’ 속에 잠들어 있다. 독일과 같은 철저한 자기반성이 없었다. 그렇게 때문에 그 잔재는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경찰이 민감한 수사기록을 폐기해 증거를 은폐했다는 논란에 휩싸이는가 하면 국정원은 직원 수십명을 동원해 여론조작을 했다는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 그 행위의 당사자들은 주어진 업무를 너무나 성실하게 수행했지만 그 행동의 가치에 대한 판단까지는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톱니로서의 역할은 완벽했지만 무엇을 위한 역할인가에 대해서는 몰랐거나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거나, 혹은 무감각해 진 것이다.
 
성실한 삶의 태도는 매우 중요하다. 특히 점점 더 복잡해 지고 세분화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 ‘나’라는 톱니가 제 역할을 해야 작게는 가정이, 크게는 사회 전체가 운영될 수 있다. 그래서 성실함은 문명화된 인간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실함이 필요한 곳은 단지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부분만이 아니다. 오히려 성실함은 전체 시스템에서 내가 맡고 있는 이 톱니바퀴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것인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알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더 필요하다. 성실한 비밀경찰, 시대착오적인 맥클레인이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물론 스스로 택한 비슬러의 초라한 현재는 고통스럽다. 이것은 비단 독일 통일 직전 사회주의 국가에서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더 심해지고 있다. 예를 들어 기업들은 ‘노동력만 팔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직원보다는 회사(혹은 월급)를 맹신하고 군말없이 충성을 다하면서 자기 자신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는 직원을 더 선호한다. 특히 고용이 불안해지고 자본과 노동의 균형추가 자본쪽으로 크게 기울어지면서 이러한 경향은 더 두드러진다. 기업들이 충분히 사람을 가릴 수 있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남은 일자리를 놓고 ‘의자놀이’를 해야만 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라는 톱니의 가치를 고민하는 것은 사치가될 수도 있다. 특히 우리나라 처럼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상황에서는 톱니의 의미를 찾아 행동에 나서는 순간 비슬러의 남루함보다 훨씬 큰 심각한 빈곤이 바로 찾아온다.
 
생각해보면 지금의 사회 시스템 전반은 톱니의 의미보다는 톱니로서의 기능성을 기르는 데만 너무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실제로 대학의 경우 자신이라는 톱니가 어디에 사용되고 싶은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가치관을 만드는 공간이 아니라 취업을 위한 전초기지처럼 바뀌고 있다. 학교수업과 기타 대학 활동 모두가 취업만을 위해 전력질주 하도록 ‘짜여진’ 지금은 대학교육 시스템은 ‘성실하기만한 비밀경찰’을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역사 속에서 “나는 성실하게 일했을 뿐이다”라는 변명은 통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승자독식’ 시스템, 궁극적으로는 시스템이 승자인 사회가 단번에 바뀌지 않는다고 해도 지금 내가 혹시 과거 동독의 슈타지와 같은 역할을 맹목적으로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 아닌지 스스로 자문해 보는 것은 중요하다.
 
특히 인터넷은 세상 모든 것을 기억하고 기록한다.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슈타지의 이상은 인터넷이 일반화된 지금 사실상 구현돼 있다. 사소한 댓글 하나, 쇼핑 목록, 심지어 책과 영화 대여 목록 조차 모두 인터넷 공간 어딘가에 남아 있다. 우리는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있지만 기록의 무게, 역사의 무게는 우리 삶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래서 어렵더라도 더 노력해야 할 것, 그리고 점점 더 중요해지는 것이 바로 톱니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타인의 삶>이라는 영화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교훈은 콘텐츠 제국주의의 첨병인 헐리우드의 액션 프랜차이즈 영화 <다이하드>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이런 반성의 의미찾기 측면에서 더 철저한데, 이번 영화가 <다이하드> 시리즈는 물론, 영화를 통한 돈벌이라는 전체 시스템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가혹할만큼 세세하게 반문하고 반성한다. 보도에 따르면 브루스 윌리스는 이번 5편인 다이하드에 이어 6편까지도 출연계약을 맺었다고 한다. 그들이 <다이하드>라는 톱니의 역할을 고민한 결과는 6편 제작 소식이 전해지느냐에 따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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