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12월부터 듣기 시작한 영어학원 첫 수업에서 강사는 모국어에 맞춰진 언어 엔진의 기어를 바꾸는데 3000시간 정도의 공부량이 필요하다는 연구결과가 있다고 했다. 좀 찾아보니 미국 언어학자 스티브 크라센 교수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려면 최소 3000시간을 투자해야 한다고 말한 내용이 있다. 많은 영어 사교육 업체들이 계시처럼 신봉하며 인용하고 있다.
나를 자극한 것은 그 다음 말이었다. 실제로 어떤 수강생이 엑셀에 표를 그려서 3000시간을 채워나가기 시작했고 기어이 다 채우더라는 것이다. 호기심 반 오기 반으로 시작한 따라하기 엑셀 쉬트 채우기가 거의 6개월 만에 여기까지 왔다. 한 칸당 30분. 아침에 일어나 수업을 들으러 가는 지하철에서 복습하고 수업을 듣고 업무 시간 중간에 공부하고 집에 오는 지하철과 집에 와서 잠들기 전 마지막 복습까지. 어느 새 1000개의 칸, 500시간이 됐다.
사람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처음에는 한칸한칸 채우기가 쉽지 않았고 ‘이 정도면 30분이지’하는 식으로 늘려서 표시하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30분을 꽉 채워 한칸을 칠하는 것에 더 재미를 붙이게 됐다. 물론 실력이 눈에 띄게 향상된 것은 아니다. 그동안 거의 들리지 않던 연음들 중 일부가 들리는 정도? 하지만 그런 것을 떠나서 하루하루 새롭게 채워져가는 칸들을 보고 있으면 ‘나의 오늘’이, ‘나의 요즘’이 무언가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성취감 같은 것이 있다.
뒤돌아보면 십여년 직장생활 가운데 최근 가장 안정적인 업무패턴으로 일하고 있다. 업무의 절대량은 경력이 쌓일 수록 많아지기 때문에 (극소수 경우를 제외하면 업무량은 급여와 비례하는 것 같다. 아니 급여와 매출에 대한 부담은 정확하게 비례한다) 점점 바빠지지만 업무에 대한 부담감은 어느 때보다 적은 상황이다. 이전 직장의 경우 끊임없이 사람을 만나면서 주어진 사실을 새롭게 해석해야 하는 부담이 커서 심리적으로 다른 지식을 머리 속에 우겨넣을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저녁 시간이 항상 유동적이기 때문에 아침 시간에 무엇인가를 고정적으로 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인생에 리셋(Reset) 버튼은 없다. 어렸을 때부터 PC를 접한 젊은 세대들에게는 엉망이 된 현실을 부정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른바 ‘리셋 증후군’이 있다고 하던데 인생의 무게는 계속 늘어날 뿐 리셋 따위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설사 완전히 개과천선(?)한다고 해도 그 전의 삶의 무게는 고스란히 짊어지고 가야 한다. 덜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이가닉 효과'(Zeigarnik Effect)라는 말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일단 시작하면 끝을 맺으려고 한다는 것인데 그래서 ‘미완성 효과’라고도 한다. 사람들이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것도 이 용어로 설명하곤 한다. 끝을 맺지 못해 계속 기억한다는 것이다. 인생은 아마도 ‘리셋 증후군’과 ‘자이가닉 효과’의 중간 정도에서 의미를 찾는 여행인 것 같다. ‘에이, 몰라! 다시 시작해’와 ‘일단 시작했으면 끝을 봐야지’ 두개의 자아가 항상 충돌하며 하루하루 새로운 색깔을 빚어낸다.
최근 내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 중에는 험난할 수 있는 모험에 기꺼이 뛰어드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아마도 이 나이 즈음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고민하는 그런 시점이 된 것이겠지. 사회 분위기가 새로운 도전에 대해 점점 더 관대해 지고 있는 것도 분명하게 느껴진다. 6개월에 500시간. 언어 엔진 쉬프트를 위한 3000시간까지는 이 패턴대로 2년 반이 더 필요하다. 그 때쯤 되면 내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여전히 내 삶은 흥미진진하다. 3000시간, 6000개의 엑셀 칸을 채워가는 것도 재밌고 와이프와 사후세계에 대해 논쟁을 하는 것도 즐겁다. 주말에 도서관에서 책보고 일하다가 근처 커피전문점에서 달달한 카페모카를 마실 수 있는 것도 기쁘다. 여러가지로 잘 하고 있고 잘 해 왔다. 앞으로의 내 모습은 더 기대가 된다.
한 가지 우울한 반전도 있다. 스티브 크라센 교수가 말한 3000시간 법칙은 딱 ‘언어 엔진 쉬트프’에 걸리는 시간이라고 한다. ‘곧잘 하네’가 아니라 ‘외국어를 이제 좀 배울 수 있는 자세가 됐군’이라고 말할 정도가 3000시간이라는 것이다. 외국어를 제대로 구사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9000시간이라고 했던가. 엑셀 표로 1만8000칸. 크헉! 이건 좀 심하게 멀다. 켁! 일단은 ‘자이가닉 효과’를 믿어 보는 수밖에. 500시간을 채운 나를 충분히 축하해주고 멋진 선물도 하나 안겨 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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