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끊임없이 의심하라, 조셉 코신스키 '오블리비언'

프리퀀시(Frequency, 그레고리 호블릿 감독, 2000년)가 대표적이다. 도심에 나타난 북극광과 마침 시작되는 30년 전 아버지와의 무선 통신. 주인공은 곧 사고를 당할 아버지를 살리지만, 그로 인해 나비효과처럼 꼬여가는 상황과 이를 해결하는 과정이 주요 내용이다. 이런 소재를 다룬 영화치곤 비교적 ‘순진한'(?) 전개를 보여주는데 아마도 동화 같은 해피엔딩 때문에 더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다. 하지만 영화 자체는 매우 속도감 있고 또 긴박하게 편집이 돼 있다. 영화 속 주인공 가족의 천편일률적인 모범적 태도가 거슬리지만 (미국이 이런 여유와 호사, 가치를 추구할 때 지구 곳곳에서 그것을 떠받치기 위한 더러운 전쟁이 수행되고 있었으므로) 해피엔딩이 갖는 힘은 무시할 수 없다.

스타트랙 다크니스(Star Trek Into Darkness, J.J. 에이브럼스 감독, 2013년)는 비슷한 소재지만 훨씬 화려하다. 스타트랙이라는 방대한 오리지널이 갖는 무게감 때문에 프리퀀시 같은 가족 모험담을 훌쩍 뛰어넘어 전 지구, 전 우주적 규모로 진행된다. 심지어 미래의 나와 현재의 나가 공존하는 설정도 나온다. 명확한 선악 구도와 방대한 스케일, 화려한 볼거리 등이 가득 담겨 있지만, 타임 슬립이 현재의 무언가를 판단해야 하는 근거가 되는 장면들이 반복돼 불편하다. 이건 ‘다 예정된 것이었으니 토 달지 말고 따라와라, 다 예정했던 일이니 참고 버텨라’라는 식의 예지론은 중세시대에 지배층의 대표적인 논리였다. 선진국 가운데 가장 종교적인 나라로 꼽히는 미국에서는 통할지 모르지만, 아직도 불합리한 면을 더 많이 겪고 보는 극동 아시아의 영화팬에게는 많이 거슬린다.

시리즈 전반에 걸쳐 우려먹기 위해 미봉책으로 사건을 마무리하는 장면에서는 실소가 나온다. (사골은 이미 전 세계적인 음식이다!)   프리퀀시 혹은 백투더퓨처 같은 개인에 초점을 타임 슬립 모험담이나 전 우주를 배경으로 한 액션도 좋지만, 덜 개인적인, 덜 영웅적인 이야기가 갖는 파괴력도 만만치 않다. 특히 외계 문명과의 접촉이나 인간의 기원에 대한 탐구 같은 종교적, 문명적 해석을 전면에 담은 영화들이 대표적이다.    

오블리비언 (Oblivion, 조셉 코신스키 감독, 2013년)은 자신을 의심하는 지구인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그린다. 외계인과의 전투로 핵에 오염돼 황폐해진 지구, 남은 인류는 우주에서 거처를 마련해 삶을 이어간다. 주인공은 이 우주 공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바닷물에서 만들어내는 설비를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다. 그러다 우연히 자신의 기억이 상당 부분 조작돼 있다는 것을 깨닫고 진실을 찾아 나선다. 이 영화에서 마침내 대면한 외계 존재에 대한 설명한 그리 많지 않다. 단지 우리의 이해범위를 넘어서는 존재로 인간이 이 존재에 대해 어떻게 대항해 왔고 앞으로 어떻게 대항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던진다. 어쩌면 가장 영악한 설정이기도 하다.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리들리 스콧 감독, 2012년)는 인류의 출발점을 찾아 나선 사람들의 공포호러물이다. 진화론은 여전히 우리의 존재를 설명하는 가장 설득력 있는 이론 중 하나지만 진화론 자체의 허점에 대한 반론도 계속되고 있다. 종교인들은 그 대안으로 창조설을 주장하지만, 이 영화는 그 창조론과 창조의 주체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은 던진다. 오랜 시간에 걸쳐 자연적으로 진화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진화가 이뤄진 것이고 그렇다면 그 의도가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질문이다.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시간여행이니 인류의 기원이니 하나는 이야기는 전혀 현실성이 없어 보인다. 적어도 어느 날 눈앞에 떡하니 외계 비행선과 생명체가 등장하는 그 날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사실 이러한 물음은 우리가 흔히 하는 물음들, 예를 들면 ‘왜 이렇게 사는 게 쉽지 않지?’, ‘내가 왜 사나?’ 같은 물음과 맥락이다.  

하루하루 휩쓸려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의아한 순간들이 있다. 마치 오블리비언의 주인공 같은 상황이다. 예전으로 돌아가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혹은 프리퀀시의 주인공처럼 어떤 사고나 사건을 막을 수 있다면 지금이 훨씬 더 행복하지 않을까. 차라리 스타트랙 다크니스처럼 나의 미래를 잘 아는 누군가에 ‘너는 이렇게 해야 해’ 모범답안을 듣고 행동하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대부분은 다 부질없는 상상이다. 오히려 프로메테우스처럼 잔인하고 알고 싶지 않았던 진실과 대면해야 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프로메테우스의 결말은 일종의 열린 결말이다. 인간이 어떻게 탄생했는가에 대한 비밀을 풀 실마리를 확인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 끝을 향해 다시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이것은 이 모든 이야기의 가장 중요한 메시지처럼 읽힌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그 자체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현재와 과거를 의심하고 고민하면서 미래의 구체적인 모습을 그려 나가는 것. 그래서 프로메테우스의 결말은 더 설득력이 있다. (2, 3편을 제작할 것이라는 소식도 들리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모습 그대로 인간은 인간이라는 것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충분히 완결 의미가 있다. 오히려 2, 3편이 나온다면 그건 흔하디흔한 외계 액션물이 되버릴 것 같다)  

이제 새로운 여행을 떠나는 주인공 일행(?)의 앞날에는 더 끔찍한 공포가 기다릴 것이다. 외계인 1명과의 사투도 이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바로 그 무모함과 호기심, 열정이야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1%가 아닐까. 그것은 곧 일상의 무모함에 맞서 싸우고 실패하고 다시 도전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