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악의 날 의외의 반전 "가방 열렸어요"

시련의 끝은 여기가 아니었다. 아침에 목이 칼칼하다 싶었는데 오후부터 가벼운 기침이 나오더니 퇴근해 집에 앉는 순간부터 정신이 몽롱할 정도로 열이 올라온다. 숨도 제대로 못쉴 정도다. 정말 밤새 앓았다. 땀으로 범벅이 돼서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계속 아팠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몸살’의 세계였던 것이다. 지난 ㅅ … 아니 수십년간 겪어보지 못한 몸살의 진가란 이런 것이었다.

뒤척이다 자고 깨기를 몇번씩 반복한 끝에 아침이 왔지만 몸은 천근만근이고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머리가 울려댄다. 마침 팀회의가 있는 날이어서 농땡이도 안된다. 꾸역꾸역 일어나 양치질, 세수, 머리를 감는다. 죽을 맛이다. 몸에 미지근한 물만 닿아도 찌르르~ 오싹함이 전해진다. 쓸데없이 가뿐 숨을 몰아쉬기를 몇번, 결국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선다.

지하철 역으로 터벅터벅 걷는다. 걸음의 충격이 온몸의 욱신거림으로 돌아온다. 집앞에서 1호선 타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죽음의 2호선-1호선 환승역에서 내려 갈아탈 생각을 하니 벌써 앞이 깜깜하다. 평소 걸음으론 충분히 탔을 만한 차를 놓치고 다음 차를 탄다. 서있기도 힘들다. 벌써 온몸은 식음땀으로 눅눅하다.   생각해보면 정말 이렇게 힘들 날이 있었던가 싶다. 최근의 업무 패턴이 약간 무리를 하는 패이스의 연속이긴 했지만 이번 것은 정말 일생에 처음 겪는 것처럼 힘들다.

그런데 의외의 반전은 지금부터였다. 환승역 인파에 휩쓸려 뒷사람 눈치보며 느릿느릿 계단을 내려가는데 누가 ‘툭’ 치면서 말한다. “가방이 열렸어요” 그는 쌩하니 사라졌지만 묘하게 고마운 느낌이 들었다. 오후에는 갑자기 몇개월 만에 선배에게 전화가 왔다. 현재 내고 있는 매체에 실을 글이 필요하니 써달라는 것이다. 얼마전 내가 쓴 글을 봤다고 한다. 한참 수다를 떨고 엄살도 떨고 하다가 결국 맡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몸 상태가 이렇지만 아직 마감까지 여유가 있어서 조금 바지런을 떨면 맞출 수 있을 것 같다.

갑자기 모르는 번호로 온 전화는 또다른 글을 잘 봤다며 모 이익단체의 협회장인 자사 대표가 한번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관련된 제언도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또다른 선배들도 간만에 보자고 연락이 왔다. 내 첫 직장, 무려 십수년된 멤버들인데 수년만에 전원 집합 대화합 술자리가 될 것 같다. 마지막은 방금 일어난 일이다. 동글동글 생긴 옆집 아저씨가 사람좋은 웃음을 머금고 초인종을 누른다. 노란색 강아지 신발을 건네며 혹시 이 집꺼 아니냐고 한다. 아마 산책시키고 오다 떨어뜨린 모양이다. 감사하다는 말을 주고 받았다.

생각해보면 철 들고 나서, 아니 돈을 벌여야 하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쉬운 순간은 많지 않았던 것 같다. 버거운 업무에 치이거나 나태한 자신에 넌더리가 나거나 혹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상황에 짜증이 치밀었다. 때론 이해할 수 없는 몸속 화학작용 때문에 의지가 꺾인다. 하지만 “가방 열렸어요” 나에 대해 거부감 같지 않고 다가와주는 누군가의 한마디에 위로를 받고, 내가 한 일에 대해 인정을 해주고, 나를 기억해주고, 나를 배려해주는 사람들에게 많이 도움을 받아 온 것 같다.

특히 요즘처럼 누구나 120%, 150% 전력질주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몸과 마음이 지치는 것도 한순간이다. 그것이 질병이든, 실연이든, 실직이든 마찬가지다. 결국은 사람에게 위로받는 것이 유일한 해법인 것 같다.

여전히 몸 상태는 ‘메롱’이다. 기침은 점점 심해지고 있고 식은 땀도 여전하다. 대신 병원 처방을 받아 약을 먹었더니 몽롱함과 욱신거림은 많이 없어졌다. 나머지는 내 몸을 믿고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만 남았다. 물론 부탁받은 원고도 마감에 맞춰 쓸 것이고, 간만에 OB 모임을 위해 몸도 만들 생각이다. 오랜만에 심하게 달릴 것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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