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바야흐로 대선이 한창 진행중이지만 올해 각 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 선출 과정의 가장 논란이 됐던 것이 바로 ‘모바일 투표’였다.
당원들 만의 체육관 선거를 통해 후보를 뽑았던 전통적인 후보선출 과정 대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일종의 예비 선거처럼 치르겠다는 구상이었는데 수십만명이 참여해 큰 주목을 받았다. 모바일 투표의 위력은 상당했다. 조직력이 비교적 열세로 지적되던 후보가 역전을 하는가 하면 전통적인 조직력이 무력화되면서 오히려 당원들이 불이익을 보고 있다는 비판도 잇따라 제기됐다. 이른바 당심과 민심의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이에 따라 후보들의 득실이 갈리면서 심각한 내분 양상을 빚기도 했다.
또 다른 야당인 통합진보당은 총선 비례대표 후보선출에 모바일 투표를 이용했는데 그 결과값의 조작 여부를 놓고 큰 혼란이 일었다. 4월 총선 결과 진보정당 사상 최대의 의석수를 얻었지만 부정선거 논란은 결국 당을 두개로 쪼개고 진보정당에 대한 깊은 불신을 낳고 말았다. 이정희라는 걸출한 여성 정치인을 잃었고 유시민에게는 또다시 분열의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일부 초선의원들을 대상으로 한 마녀사냥은 좌우 이념의 경계를 넘어 한목소리로 저주를 퍼부었다. 진보정당이 다시 재건되기까지 앞으로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반면 모바일 투표에 대한 옹호론도 만만치 않다. 올해 각 정당이 활용한 모바일 투표의 방식은 ARS 자동응답 시스템이었다. 미리 설정된 비밀번호로 본인 인증을 하면 후보자별 번호를 안내 방송을 들은 후 키패드로 해당 후보 번호를 누르면 투표가 완료된다. 투표장에 가지 않아도 되고 전화를 수차례 반복해서 걸기 때문에 시간에도 제한을 받지 않는다. 유권자에게는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 셈이다. IT와 정치의 결합을 통해 시간과 장소의 제약이 있었던 전통적인 투표의 한계를 넘고자 했던 것이 바로 모바일 투표였다.
현재는 이른바 ‘정치불신’ 시대다. IT 기술을 이용한 새로운 투표방식은 과연 유권자와 정당 혹은 정치 사이의 간극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일부의 우려대로 비밀, 직접 선거라는 투표의 기본원칙이 흔들릴 수 있고 자칫 선거결과까지 조작되는 재앙의 전주곡일까.
투표소 투표부터 인터넷 투표까지 다양
모바일 투표는 전자투표(e-Voting)의 한 방식이다. 전자투표란 유권자 등록과 투표, 개표, 검표 등 일련의 선거과정에 걸쳐 전체 혹은 부분적으로 IT 기술을 활용한 선거관리 방식을 의미한다. 대학 선거와 기업 주주총회의 등은 물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최근에는 정당의 대통령선거 선출에도 사용돼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전자투표는 크게 투표소 전자투표(Poll Site E-Voting), 원격 인터넷 투표(Remote Intenet E-Voting) 방식으로 구분된다. PSEV는 투표소에 나와 전자적 방식으로 투표를 하게 되며 유권자는 기존 방식대로 투표소에 가 마치 ATM와 같은 투표 기기의 터치 스크린 화면을 보면서 투표하거나 버튼을 누르게 된다. 투표 행위 자체만 놓고보면 기존 방식과 큰 차이가 없지만 투표 결과를 디지털화해 저장하고 이를 개표하기 때문에 투표 이후 과정에서 큰 차이가 있다.
보통 PSEV 방식에서는 유권자 등록명부 확인과 투표값 전달에 온라인 통신망이 이용되고 개방된 사설망이 아니라 폐쇄된 공공망을 사용한다. 투표기와 개표시스템이 서로 분리돼 있어 전자투표 방식 가운데 가장 안전하고 논란의 소지가 적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흔히 전자투표를 도입하는 초기 국가들이 많이 활용하는 방식이며 일본, 브라질 등이 PSEV 방식을 적용한 전자투표를 일부 실시하고 있다.
REV 방식은 사용되는 기술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구분된다. 문자메시지를 이용한 모바일 SMS 투표나 디지털 TV를 이용한 투표, PC 등 인터넷을 이용한 투표 등이 가능하며 투표소에 가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투표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SMS 투표의 대표 사례가 바로 스위스인데 유권자들이 선거일 전에 SMS 투표에 사용될 비밀번호와 SMS를 보낼 전화번호를 우편을 통해 받고 투표 당일에 안건에 대한 찬반 등 의견을 담을 SMS를 보내는 방식이다. 국내에서 시행된 모바일 투표는 걸려온 전화를 받아 지지 후보를 선택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스위스 방식보다 훨씬 간편하게 투표할 수 있다.
REV 방식은 여러가지 전자투표 방식 가운데 가장 편리한 반면 시스템 보안이나 비밀투표 원칙 침해 가능성 등 때문에 뜨거온 논란에 휩싸이기도 한다. 정당내 선거와 같은 비교적 작은 선거에서도 논란이 불거지기 때문에 현재 REV 방식을 전면 도입한 나라는 거의 없으며 주로 작은 규모의 지방선거 등에 시범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양자의 중간자적 위치를 갖고 있는 키오스크 방식도 있다. 백화점, 공원, 도서관 등 불특정 다수가 모이는 장소에 전자투표기를 설치해 투표하는 방식이다. 디지털 서명이나 스마트 카드, 지문인식 등의 기술을 통해 본인 인증을 한 후 투표할 수 있다. 가까운 투표소 어디서든 투표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일반 인터넷망을 사용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PSEV 방식보다는 보안성이 떨어진다.
전자투표를 둘러싼 오래된 논란들
전자투표의 가장 큰 장점은 투표율을 올릴 수 있다는 점이 꼽힌다. 지속적인 투표율 하락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 확산은 현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전자투표는 투표 과정 자체를 쉽고 빠르게 하는 장점이 있어 일본의 경우 유권자가 20만명 이상인 큰 선거에서 10% 이상, 영국의 경우도 5% 이상 투표율이 올라갔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이밖에 투개표 과정이 전자화되기 때문에 개표시간이 줄어 들고 유권자 신분 확인을 위한 인력과 수작업 혹은 기계를 이용한 수동식 개표인력 등이 줄어들기 때문에 전체 선거비용을 절약할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무엇보다 적용하는 기술에 따라 투표에 대한 공간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무효표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어 유권자의 실제 의도를 더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전자투표다.
반면 전자투표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도 계속 나오고 있다. 가장 큰 논란거리는 신뢰성이다. IT 기술을 통해 투표가 이뤄지는 만큼 악의적인 목적으로 이 시스템을 공격할 경우 투표 결과가 외부로 유출되거나 심지어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다른 논란거리는 정보격차다. 상대적으로 IT 기술에 덜 익숙하고 쉽게 접할 수 없는 노년층과 저소득층의 경우 IT 기술에 익숙하지 않다는 이유로 투표를 꺼려하거나 혹은 투표 과정에서 실수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진다. 투표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정치적으로 배제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신뢰성 논란에 대한 대안들
그렇다면 전자투표를 둘러싼 이러한 우려들은 과연 그만큼 심각한 것일까. 일반적으로 투표 과정의 신뢰성은 각 유권자가 투표한 대로 시스템에 기록됐는지, 그리고 투표가 개표결과에 정확히 반영됐는가 등 두 가지가 핵심이다. 그리고 이를 검증할 수 있는 기술은 이미 수십년 전부터 나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믹스넷(Mix-net)이다.
믹스넷은 입력값과 출력값 사이의 연결정보를 알 수 없도록 섞는 기술이다. 다수의 믹스서버로 구성되며 각 믹스서버는 초기 입력값 또는 이전 믹스 서버의 출력값을 입력받아 섞는 과정을 반복한다. 믹스넷을 이용하면 투표 당사자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개인의 정치적 선택을 보호할 수 있고 동작과정과 결과를 누구나 검증할 수 있어 개표의 신뢰성을 확보할 수 있다.
투표결과를 유권자가 직접 검증할 수 있는 방법도 있다. 프랫어보우터(Pret a Voter)와 스캔터그리티(Scantegrity)가 대표적이다. 투표과정에서 유권자에게 고유번호가 적힌 일종의 영수증을 발급하고 이를 통해 유권자 본인만 선거 과정에 자신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프랫어보우터는 현재의 투표 방식과 매우 흡사하다. 유권자는 투표용지를 받아 지정된 장소에서 기표해 절반을 분리한 후 한쪽을 개표기인 스캐너에 입력한다. 이것은 투표 영수증이 된다. 이 영수증에는 개인별로 고유의 암호값이 적혀 있어 투표가 끝난 후에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투표가 반영됐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스캔터그리티는 투표과정은 동일하고 단 투표용지마다 바코드 형태의 일련번호를 부여해 영수증으로 활용한다. 코드 용지마다 값이 다르고 후보자에 대한 코드가 또 다르기 때문에 투표 후 유권자는 바코드와 후보의 코드를 통해 자신의 투표가 정확히 반영됐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들 기술들의 안정성은 이미 20년 이상 검증됐다는 점에서 전자투표의 신뢰성을 높일 수 있는 대안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기술을 활용해 이미 해외 여러 나라들이 전자투표를 활발하게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미국, 스위스 등 50여개국 활용
현재까지 전세계적으로 50여개국 정도가 전자투표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스위스, 네덜란드, 벨기에, 호주, 스페인 등은 기존 투개표 방식의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전자투표를 도입했다. 브라질이나 인도 등 저발전국에서 선거부정의 대안으로 전자투표를 적극 도입하고 있다. 브라질의 경우 1994년 선거부정 사건을 비롯해 민주화 이후의 선거에서도 부정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면서 정부 주도로 전자투표제를 실시했다. 2000년 이후에는 모든 선거에 전자투표를 도입해 시행하고 있다. 브라질은 현재 투표관련 기기를 수출하는 등 대표적인 전자투표 성공국가로 꼽힌다.
영국과 일본의 경우 전자투표를 통해 선거과정의 인력과 자원낭비를 줄이고 있다. 전자투표를 시행할 경우 투개표 인원이 줄어들고 개표 시간이 줄어들어 선거비용을 줄일 수 있다. 브라질이나 인도처럼 산간지역이나 오지가 많은 경우 투개표 비용이 많이드는데 이런 나라에서 전자투표는 선거비용을 줄이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합리적인 방안이기도 하다.
도입 목적 | 국가들 | 사례수 |
선거환경개선 | 스위스, 미국, 스웨덴, 네덜란스, 핀란드, 영국, 일본, 벨기에, 독일, 프랑스, 호주, 스페인, 에스토니아, 베네주엘라, 아르헨티나 등 | 17개국 |
투표율 제고 | 스위스, 아일랜드, 미국, 네덜란드, 핀란드, 영국, 일본, 독일, 캐나다, 프랑스, 에스토니아, 브라질 | 12개국 |
선거비용 절감 | 스위스, 아일랜드, 핀란드, 일본, 아르헨티나, 인도 | 6개국 |
국가전략 및 공공 효율성 증진 | 영국, 일본, 스페인, 에스토니아 | 4개국 |
선거부정 해소 | 브라질, 인도 | 2개국 |
에스토니아는 어떻게 전자투표 선진국이 됐나
전자투표 분야에서 전세계적으로 가장 앞서있다는 평가를 받는 국가는 바로 에스토니아다. 2005년 10월에 실시된 지방선거에서 인터넷 기반의 전자투표를 실시해 세계 최초의 전국 단위 원격투표(REV)를 실시한 국가로 기록돼 있다. 기존의 투표소 방식 투표와 전자투표, 우편투표를 혼용하고 있는데 2011년의 경우 2005년 투표 대비 전자투표 참여인원이 14배 이상 늘어나는 등 주요 투표수단으로 빠르게 자리잡고 있다. 에스토니아는 지난해 3월 국회의원 선거를 모바일 투표로 선출하기도 했다. 정당내 선거에서도 논란을 벌이고 있는 우리나라에 비하면 에스토니아가 얼마나 전자투표 분야에서 앞서 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사례다.
에스토니아가 이처럼 전자투표 선진국으로 성장한 배경에는 잘 발달된 IT 인프라와 정부의 강력한 정보화 정책이 큰 몫을 차지한다. 에스토니아는 전체 인구가 135만명 정도의 작은 국가지만 매일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이 전 인구의 63%이고 휴대폰 보급율이 100%가 넘는다. 우리나라의 신분증에 해당하는 전자 주민증을 이용해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고 도서관 카드와 의료보험카드까지 대체하고 있다. 에스토니아의 공공정보화는 사생활 보호 논란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고도화돼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토니아가 전자투표 시스템을 이렇게 광범위하게 그것도 (급진적인!) 모바일 방식까지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투명한 운영에 있다. 특히 전자투표 관련 IT 기술에 대해 철저하게 투명성을 검증해 시행한 것이 주효했다.
에스토니아가 사용하는 전자투표 시스템은 모든 컴포넌트에 대해 컴퓨터 감사를 받는다. 또한 소스코드와 작동방시을 완전히 투명하게 규명할 수 없는 시스템은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정부가 아닌 외부에서 만든 인증 매커니즘이나 서비스를 사용하지 않고 소스코드 전체를 확인할 수 없는 컴포넌트도 사용하지 않는다. 유명 기업들의 소프트웨어들은 모두 영업비밀로 보호를 받기 때문에 소스코드 전체를 볼 수 없다. 우리나라의 정부 보안시장에 시만텍을 비롯한 해외 유명 업체들이 들어오기 힘든 것도 소스코드 전체를 제출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에스토니아가 소스코드를 볼 수 없는 즉 블랙박스(BlackBox) 형태의 소프트웨어를 선거 시스템에 사용하지 않는 것은 그만큼 시스템 전체를 투명하고 공정하게 운영하겠다는 의지인 것이다.
대신 주로 사용하는 것이 바로 오픈소스다. 에스토니아의 선거시스템은 가능한 한 단순하게 시스템을 구성했고 오픈소스 운영체제인 데비안(Debian) 기반의 안정적이고 보안이 강력한 플랫폼 구축했다. 널리 알려진 프로그래밍 언어를 사용하고 서버 운영을 위한 불필요한 유저 인터페이스도 과감하게 없앴다. 이를 통해 컴퓨터 전문가라면 누구나 선거시스템에 문제가 없는지 검증할 수 있게 했고 이 과정에 자본이나 외부의 입김이 들어갈 수 없도록 공공기관 주도로 철저하게 관리,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에스토니아 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한 선거시스템 관련 가이드라인에는 이런 내용이 상세하게 포함돼 있다. 선거 이후에도 감사(audit)가 가능하도록 투표가 완료된 값, 투표가 중단된 값, 집계가 된 투표값, 무효 투표값, 유효 투표값 등 5가지 로그 기록을 남겨놓는다.
선거시스템에 사용된 시스템 컴포넌트(운영체제, 웹서버, 지원 라이브러리)의 가이드라인
- 이미 널리 사용되고 충분한 시간에 걸쳐 테스트가 이뤄져 가능한 신뢰성이 높은 컴포넌트를 선택해야 한다. 소스코드를 비롯한 컴포턴트 관련 정보를 문서화돼야 한다.
- 컴포넌트들은 오리지널 소스로부터 실행돼야 한다. 일부분의 삭제와 설정 변경 등 모든 수정 사항은 문서화돼야 한다.
- 사후 감사는 오리지널 소스로부터 소프트웨어를 다운로드하고 2항의 문서에 따라 변경 내용을 적용해 비슷한 시스템 상황으로 반드시 구축할 수 있어야 한다.
시스템 환경 개발과 선택에 대한 가이드라인
- 유권자의 환경은 집이나 사무실 PC 운영체제를 가정해야 하며 사용자 환경 설정은 바꾸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용자 플랫폼을 지원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매우 복잡하고 따라서 비용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 중앙 시스템 환경 선택은 기본 시스템의 통합과 보안에만 집중돼야 한다. 다른 시스템 프로그램에 대해서 프로세스를 방해하거나 나누는 등 영향을 주는 것은 부정적이다.
물론 전자투표를 놓고 극심한 갈등을 보인 사례도 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전자투표 도입을 사실상 중단했다. 영국은 2001년 이후 터치스크린, 전화, 인터넷, 키오스크, 디지털TV 등 다양한 방식의 전자투표를 도입했고 2008년 지방 선거에서는 런던내 3,500여개 투표소 전역에서 전자투표가 실시됐다. 그러나 이 선거의 개표 과정에서 투표용지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오류가 발생해 결국 시민사회의 반대에 부딪혀 전자투표 계획 자체가 취소됐다.
네덜란드도 투표의 편의성을 높이기 위해 1982년 처음 전자투표를 도입한 이후 1998년 이후 총선과 대선에서 전자투표기를 이용한 투표가 광범위하게 적용됐다. 특히 2004년 유럽의회 선거에서 인터넷을 이용한 전자투표가 시범 실시되면서 광범위한 전자투표제 시행이 점쳐지기도 했다. 그러나 2006년 한 시민단체가 전자투표기의 안정성에 대한 결함을 밝혀내 공개하면서 결국 전자투표가 전면 금지됐다. 그러나 에스토니아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철저하게 시스템을 검증하고 강력한 IT 정책을 통해 뒷받침한다면 전자투표 시스템 자체가 갖고 있는 기술적인 결함은 거의 해결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전자투표 ‘시작은 빨랐지만…’
우리나라도 전자투표를 도입하려는 움직임은 지난 200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05년 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한 ‘전자투표 로드맵’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적합한 전자투표 방식으로 PSEV인 터치스크린으로 확정하고 이를 도입하는 세부적인 계획을 마련했다. 이에 따라 2006년부터 선관위에 위탁되는 선거에 전자투표를 시범 시행해 2007년 재/보궐선거를 시작으로 점차 확대하는 것으로 돼 있다.
실제로 그 이후 각종 조합장 선거와 대학교 학생회장 선거, 총장 선거, 정당의 당내 경선 등 민간 선거 등에 터치스크린 투표시스템이 폭넓게 활용됐다. 전자투표 도입은 매년 늘어나 2006년 41건 6만명 정도에서 2009년에는 894건 54만명 까지 늘어났다. 지난 7월 제헌절에도 일부 지방 선관위가 터치스크린 방식의 전자투표 체험 행사를 열기도 했다. 당초 선관위의 전자투표 로드맵에 따르면 올해 국회의원 선거부터 집이나 사무실에서 인터넷을 통해 투표하는 REV 방식을 도입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미 7년전에 수립된 계획이어서 일부 조정이 불가피하다는 점을 고려해도 전자투표 도입이 매우 지지부진한 것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 관련 논의가 진척이 안되는 것은 다양한 이유가 지적된다. 정보격차, 예산상의 문제, 시스템의 신뢰성 등 다양한 근거가 동원되고 있다. 특히 모바일 투표가 비판의 표적이 되고 있는데 본인 확인 절차가 허술하고 투표값을 들춰볼 수 있으며 노년층의 휴대폰 활용 능력이 떨어지고 젊은 층의 가중치 부여 등으로 ‘직접·비밀·보통·평등’이라는 선거의 4대 원칙을 훼손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진보적인 학자들조차도 모바일 투표 과정에서 모바일 문화와 친숙한 그룹이 과다 대표되는 문제가 생기고 딱히 소외계층이나 사회적 약자에 기반을 두는 것도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기술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이미 나와 있는 상태인데다 기존 투표소 투표 방식을 함께 병행하기 때문에 휴대폰에 익숙치 않은 노년층에 대한 역차별은 가정부터 틀린 지적이다. 본인인증 문제는 모바일 공인인증 등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 모바일 세대에 대한 과대대표 문제는 기존의 비모바일 세대에 대한 과대대표 문제에 대한 상쇄 측면이 있고 정치 참여세대를 확장한다는 측면에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특정 세대에 대해 가중치를 부여하는 것은 정당내 선거에서 선거의 목적에 따라 일시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것이어서 이를 전국 규모의 선거로 확대했을 때는 적용하지 않으면 된다.
오히려 국내에서 전자투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못하는 것은 투표방식 변화가 몰고올 정치지형 변화에 대한 정치인들의 거부감이 더 큰 것으로 보인다. 전자투표 역시 정치에 유권자들의 목소리를 더 충실하게 반영하자는 취지의 한 수단일 뿐이다. 이를 위해서는 투표시간을 연장하거나 선거인명부를 통합해 전국 어디서나 가까운 투표소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굳이 전자투표가 아니어도 다른 수단이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논의들이 모두 지지부진한 것은 투표율의 변화에 따라 정치집단별 이해가 첨예하게 갈리기 때문이다.
개별 사안에 대한 여야간의 논쟁을 제쳐 놓고라도 2005년 참여정부 시절 공격적인 전자투표 시행계획을 세웠던 선관위가 MB 정부들어 정당내 선거조차도 모바일 투표 방식은 대행하지 않겠다고 거부하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미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의 인터넷 인프라는 세계 최고 수준이고 전자정부 평가에서 볼 수 있듯 공공시스템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선관위 차원에서 충분한 인력과 비용을 투입해 검증된 전자투표(모바일 투표) 시스템을 개발해 운영한다면 정당내 선거는 물론 공직자 선출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모바일 투표 시스템을 단기간에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통합진보당 사태의 본질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해 아쉬운 대목도 바로 여기다. 통합진보당은 지난 4월 총선 비례대표 선거를 모바일, 온라인 투표로 진행했다. 그러나 이 선거는 부정 논란에 휩싸였고 총선 결과 13석이라는 진보정당 사상 최대 의석을 확보하고도 결국 당이 두개로 쪼개지고 말았다.
논란의 핵심은 부정투표, 대리투표 여부다. 특정 지역에서 한 후보에 대한 무더기 몰표가 나왔고 동일 IP에서 투표한 것으로 드러나면서 부정선거 논란이 불붙기 시작했다. 현재까지의 검찰조사 결과와 각 진영의 해명을 종합해 보면 거의 모든 후보들이 편법 혹은 탈법으로 유권자를 모았고 모바일 투표를 실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11월 15일 검찰이 이 사건 관련자로 기소한 인원은 무려 460여명으로 여기에는 비례대표 후보자 3명도 포함돼 있다. 한 당선자의 경우 전체 득표의 60% 가량이 중복투표 방식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만큼 선거관리와 선거시스템에 허점이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모바일 선거 시스템을 개발한 업체의 해명은 문제의 출발점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에 대한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통합진보당에서 시스템 개발을 의뢰한 것이 선거를 고작 1달 앞둔 시점이었다. 당원 데이터베이스를 합치는 작업이 선행돼야 했고 결국 시스템을 개발하자 마자 제대로 테스트도 못하고 바로 투입해야 했다. 지난해 기준 연매출이 6억원에 불과한 이 업체가 총선에서 최대 10석까지 국회의원을 선출할 수 있는 당내 경선 시스템을 사실상 1인 개발로 짧은 시간에 개발해야 했던 것이다.
개발된 시스템엔 당연히 오류가 있었다. 개표 로직이 잘못돼 적게는 24표까지 오차가 발생했다. 이 때문에 선거 과정에서 소스코드가 여섯번 수정됐지만 변경 내용에 대한 문서화 작업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각 유권자의 투표값는 SAH256 방식으로 암호화됐지만 부정선거 논란이 불거진 이후 결국 모두 복호화, 즉 유권자 개인이 누구를 찍었는지 다 밝혀지게 됐다.
만약 에스토니아 선관위의 시스템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하나하나가 다 허점 투성이다. 시스템은 충분히 검증되지 못했고 문서화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특히 개별 투표값에 대한 암호가 풀리면서 비밀선거 원칙이 심각하게 훼손됐다. 결국 선거를 둘러싼 논란은 계파갈등, 종북논란으로 확대됐고 진보정당의 가장 특별한 성과가 하루아침에 허공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만약 선관위에서 충분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안정적인 시스템을 개발한 후 정당의 내부 선거를 공식적으로 대행했다면 이러한 엄청난 정치적, 사회적 비용은 치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미국의 파격 ‘이메일 투표’
최근 미국 대통령 선거는 전자투표의 미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미국 역시 넓은 영토와 다양한 문화, 선거방식 등으로 전자투표를 일찌감치 도입한 나라 중 하나로 꼽힌다. 특히 지난 2000년 아날로그 투표방식인 펀치카드에서 18만표 이상의 대량 무효표가 나오면서 그 보완책으로 간편한 방식의 전자투표기를 도입한 것을 시작으로 광학스캐너 방식, 터치스크린 방식 등 다양한 전자투표가 검토, 도입됐다.
그러나 이들 시스템의 기계적 결함으로 인한 오동작 문제가 불거지면서 시민단체와 정당들이 전자투표기 제조사를 상대로 정확성, 기계결함 등을 이유로 법적 소송을 잇달아 제기했다. 특히 터치스크린 방식의 경우 문제가 발생할 때 재검표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첨예한 갈등으로 번지곤 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전자투표가 확대되는 것은 더이상 힘들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판단이었다. 종이투표로 돌아가는 지역도 나왔다.
그러나 그런 미국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일부 지역에 한해 가장 극단적인 전자투표 방식인 이메일 투표를 허용했다. 초강력 허리케인 ‘샌디’의 영향으로 집에 돌아오지 못한 뉴저지 주민들에게 인터넷으로 투표용지를 다운로드해 이메일로 투표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미국 역시 투표율을 낮추려는 보수세력의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빗발치는 보안 우려에도 불구하고 이메일 방식 투표를 허용한 것처럼 미국의 투표 제도는 유권자의 투표참여를 훨씬 폭넓게 보장하고 있고 이것이 일반화 돼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참여 확대
결국 투표는 사회 전체의 신뢰를 가늠하는 척도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시스템과 제도에 얼마나 실효성 있게 마련할 것인가에 따라 사회의 성숙도가 나타난다. 에스토니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전자투표 관련 기술들은 가장 급진적인 방식인 모바일 투표까지도 검증할 수 있는 기술들이 이미 나와 있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전자투표에 대한 경험을 쌓고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길 수 밖에 없는 오류들을 투명하게 고쳐나가는 프로세스를 만들고 이에 대해 신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IT 기술은 이제 거의 모든 사회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다. 가장 보수적이고 민감한 영역으로 꼽히는 금융거래와 입시에도 IT 시스템들이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다. IT 기술과 정치가 만나는 전자투표 역시 도입 시기의 차이가 있을 뿐 결국은 IT와 기존 사회시스템들이 융합하는 거대한 흐름으로 귀결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점점 더 투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일하게 세력 균형을 강제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다. 제조업 기반이 무너지고 3차산업 중심으로 경제시스템이 재편되면서 기업내 세력관계에서 노조는 이미 사측(과 대등하게 협상하는 것은 고사하고)을 견제할 수 있는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 개인들은 점점 더 파편화되는 반면 대기업과 1% 부유층으로 대변되는 자본은 똑똑한 사람을 비싼 월급주고 고용해 세련된 논리를 만들고 충분한 자금력으로 정치인과 관료에 로비를 하는가 하면 사법시스템에 까지 손을 뻗히고 있다.
모든 것을 돈으로 살 수 있는 시대에 유일하게 대놓고 광범위하게 구입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투표다. 그래서 오히려 그것을 적극적으로 행사하지 못하도록 시스템과 제도를 수정하고 이를 설득하는 논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의도적으로 투표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느 누구도 출근 혹은 투표의 번거로움 때문에 투표에서 소외되서는 안된다. 이미 기술적으로 가능하고 사후 검증도 가능한 전자투표를 막연한 우려를 근거로 내세우며 어렵다고 말하는 사이에 정치에 대한 냉소가 외면이 확산되고 결국 특정 이해집단에게 유리한 현재 상황이 고착화되고 있다.
전자투표는 다양한 방식으로 유권자의 선택을 최대한 반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충분한 예산과 인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확대돼야 한다. 모든 국민이 자신의 이해수준에 따라 판단하고 그 의사를 정치에 최대한 반영할 수 있어야 한다.
개개인 한사람 한사람 모두가 뚜렷한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직접 민주주의는 고대 그리스처럼 도시국가 단위에서나 가능했던 일로 여겨지고 있다. 대의정치의 수단인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의지가 없고 생각이 없는 것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러나 IT는 이러한 정치 시스템의 대안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 투표소 투표와 온라인 투표, 모바일 투표 등 다양한 방식으로 통해 개인이 자신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통로가 더 많아질 때 그동안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직접민주주의’도 가능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21세기 IT가 정치를 바꾸고 또 우리의 삶은 바꿀 수 있는 진정한 힘이다.
참고자료
진보의 블랙박스를 열다 김인성 외 도서출판 들녘 2012년
전자투표 시스템 실용화 현황 및 전망 전웅렬 외 한국정보보호학회지 2011년
전자투표의 사회적 합의기반 실행사업에 관한 연구 한국정치학회 2009년
에스토니아의 국가정보화전략과 인터넷 투표정책 조희정 2008 년
에스토니아 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
LAST UPDATED November 17, 2012 1:30:4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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