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theEnd] 2025년 11월
2025-12-10
2theEnd to the end, 끝까지 본 작품에 대한 짧은 기록
- 박지리 저자, 사계절 출판사
- 이 작품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대화 장면이다. 마치 여러 작가가 각 캐릭터 입장에서 글을 쓴 후 합쳐 놓은 것처럼 각 화자의 입장이 대화에 잘 녹아 있다. 그러면서도 억지스럽지 않고 자연스럽다. 근래 읽었던 작품 중 대화 장면이 가장 생생하다. 반면 메인 사건이나 구성은 아쉽다. 계급 사회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가 거슬리고, 느닷없이 공개된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비밀(?)도 임팩트가 크지 않다. 주인공 다윈이 그 비밀의 이유와 배경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순식간에 납득하고 공감하는 전개가 급작스럽다. 아버지와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을 어른이 되는 것으로 설명하고, 이런 모습에 거의 유일한 여성 캐릭터가 갑자기 끌리는 장면에선 당혹스럽다.
- 김철현 글ㆍ그림, 카카오 웹툰
- 고려 몽골 항쟁을 배경으로 한 액션 웹툰이다. 배경이 되는 시기가 특정되고 실제 역사 속 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만화적 과장이 어느 정도 절제돼 있다. 이게 장점이자 단점이다. 또한, 이런 단출한(?) 그림체가 무협지에 어울리는지 의문이다. 무협 액션 웹툰에 흔히 기대하는 속도감과 무게감이 작화에서 잘 드러나지 않는다. 또,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면 정서적으로 지친다. 마치 영화 <본> 시리즈 같은 피곤함이다. 만나면 싸우고 달려가 싸우고 쫓아가 싸우고 다쳐도 싸운다. 어느 순간 밥은 안 먹고 잠은 안 자나, 싶을 만큼 싸움만 해대는 주인공이 부담스럽다. 이러니 어느 순간 주인공의 캐릭터가 무색무취 전투 기계처럼 느껴져서 무심히 스크롤하게 된다. 마치 <드래곤볼>의 손오공과 비슷하다. 만화 초반 엉뚱한 시골소년이었던 손오공은 어느 순간 훈련하고 싸우고 죽고 부활하고 훈련하고 싸우고 죽기만 하는 이상한 캐릭터가 됐다.
- 시즈노 코분 감독, 니헤이 츠토무 원작
- 중국 무협지와 일본 촉수물의 이종교배 같은 작품이다. 중국 무협지 주인공은 어찌어찌 타인에게 절대무공을 전수 받아 문제를 해결하고, 이 와중에 주변에 미녀가 자꾸 꼬인다(?). 이 작품 속 타니카제가 딱 그렇다. 할아버지에게 수백 년의 경험을 집약적으로 전수 받고 미녀들의 일방적인 구애를 받는다. 또래의 이성은 물론 중성(아직 성별이 정해지지 않은 존재)에게 어필하고, 심지어 연상의 메카닉 전문직 팀장까지 “광합성을 하고 싶다”며 고백한다. 이 모든 것이 주인공의 노력 혹은 플러팅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능력에 반한, 아니 능력을 보여주기 전부터 시작된 적극적인 구애다. 심지어 시즌2의 마지막에는 적에 사로잡혀 괴물이 된 유사(?) 엑스 썸녀의 목숨을 건 키스 장면까지 등장한다. 여기에 참 거시기한(!) 괴수 디자인을 결합해 괴랄한 촉수물 느낌 무협지 사토리를 완성했다. <시도니아의 기사>는 이 작가의 작품 중 그나마 기승전결이 확실하다고 알려져 있다. e북으로 국내 정식 발매되면 구매할 생각이었는데, 마음을 고쳐 먹었다. 도대체 니헤이 츠토무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 세시타 히로유키 감독, 니헤이 츠토무 원작
- 이런 러브라인이 가능해? 정말 가능해?! 오랫동안 곁을 지켜준 그녀(그)에게 너무한 거 아닌가, 라는 생각에 거부감이 앞선다. 그리고 무려 ‘어? 내가 그 기술 복제해 냈어!’ 한 문장으로 러브라인을 완성한다. 차라리 외계 생명체 ‘가우나’가 왜 우주 지식의 결정체인지 더 풀어 냈으면 훨씬 설득력 있지 않았을까. 우리 말 제목도 이상(!)하다. 사랑을 잣다? 일본어 원문이 자아내다라는 의미라는데, 처음에는 이런 욕(?) 같은 단어를 굳이 왜 사용했을까 의아했다. 그런데 핵심 인물의 이름 ‘츠무기’가 기모노 소재 옷감이란다. 결국 제목 자체가 엄청난 스포였던 셈이다. 이쯤되면 번역가가 얼마나 고심했을지 ‘짠함을 잣는’ 제목이다. ‘그 후로도 행복했습니다’ 해피엔딩의 힘은 강하지만 너무 나갔다. 이런 와중에 OST가 열일했다. 노골적인 군가풍이어서 처음엔 거슬렸는데, 몇몇 장면은 오로지 OST가 멱살 잡고 끌고 가며 쾌감을 선사한다.
- 강지영 작가, 자음과모음
- 오줌에 삶은 오리알, 구린 똥 냄새와 달짝지근하고 맵싸한 무 냄새 등 적나라한(?) 묘사가 인상적이다. 터분하다, 얼음을 지쳤다, 오세가 말짱하다 등 널리 알려지지 않은 우리말 표현이 신선하다. 의식적으로 노력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만큼 글쓰기에 공을 들였다는 증거다. 덕분에 읽는 맛이 있다. 특히 개구리와 막걸리 에피소드는 그 상황과 맛, 냄새를 놀랍도록 생생하고 찐득하게 묘사했다. 또한, 소설 속 가족 구성이 파격적이다. 특히 엄마와 아빠에 대해 역할은 물론 호칭까지 바꿔 버렸다. 반면, 주인공 엘자와의 스캔들(?)은 시시하다. 둘 사이에 어떤 특별한 공감이 형성되기도 전에 클라이막스로 내달린다. 어린 시절과 성인 시간 사이에 작은 에피소드를 회상 형식으로 넣어 둘 사이의 감정을 조금 더 촘촘하게 쌓았으면 어땠을까. 이런 상황에서 열린 결말은 손쉬운 선택처럼 느껴진다. 적나라한 ‘묘사’는 재능과 노력이지만, 적나라한 ‘후일담’은 용감한 작가만이 누리는 특권이다.
- 봉봉 글/그림, 씨네21 북스
- 미래와 신기술을 다룬 그래픽 노블이다. 책 제목은 그 중 죽음을 리얼리티 쇼로 소비하는 사회를 다룬 단편의 제목이다. 가장 인상적인 단편은 인공 자궁 논쟁을 페이크 다큐 방식으로 그린 <ANA>다. 책 속 묘사처럼 일단 만들어진 기술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돈이 안 된다고 판정이 돼도 일단 봉인될 뿐 언젠가 경제성을 회복(?)하면 다시 등장한다. 이런 기술 자본주의 시대에, 어떻게 태어났든 생명은 상관없이 생명은 여전히 생명이라는 메시지는 설득력이 있다. 현실에서 가장 최근에 등장한 파괴적인 기술인, 인공지능이 과연 어디로 흘러갈지, 다시 생각하게 되는 대목이다. 가장 독창적인 작품은 <햄스터가 손톱을 먹었다>다. 나와 똑같은 내가 삶의 위로가 될 수 있을까. 나 하나 건사하기 쉽지 않은 세상에서 온전한 내 편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쉽게 떠오르는 것이 타인을 향한 사랑이지만, 이 작품은 나의 분신을 통해 나를 온전하게 재발견하는 것이 외로움을 이기는 궁극의 방법이라고 말한다. 흥미롭다. 또하나, 이 책을 보고 있으면 같은 콘텐츠도 읽는 경험을 통해 차이를 만들 수 있음을 느낀다. 웹브라우저를 통해 빠르게 소비되는 웹툰 형식 콘텐츠를 이북으로 보는 것 뿐인데도 콘텐츠를 받아들이는 태도와 속도가 훨씬 진득해진다.

